659쪽에 이르는 ‘반기문 결단의 시간들’은 반기문(77) 전 유엔 사무총장이 자신의 손으로 쓴 최초의 책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출판부에서 지난 6월 ‘Resolved’라는 제목의 영문서를 먼저 펴냈고, 한국에선 지난주 김영사가 출간했다. 반기문 유엔 10년을 결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반 전 총장은 컬럼비아대학에 양해를 구한 뒤 한국판에 챕터 하나를 추가했다. ‘제5부: 나의 정치 참여’ 부분이다.
22쪽 분량의 장(章)에 그는, 2017년 1월 12일부터 2월 1일까지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이라 명명됐던 한국 대선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가 도망치다시피 했던 20일간의 소회를 밝혔다.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패륜’ ‘후안무치’ ‘추잡한 정치 공세’ 등 격앙된 표현으로 한국 정치 사회를 직격했다. 공항 철도 티켓 구입 논란, 부친 묘소 퇴주잔 논란, 기업인 박연차에게 돈을 받았다는 주장에 반격하고, 대선 과정에서 나온 비방 댓글을 “우리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실망도 숨기지 않았다. “대통령의 인식이 그러하니 악성 댓글이나 가짜 뉴스가 더 판을 치고 횡행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에 있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 재단’ 사무실에서 반 전 총장을 만났다. 그는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나의 책임이었다”면서도 “정치 철학은 없고 정치 술수에 기대는 질 낮은 정치는 종식돼야 한다. 당시 나의 불출마를 지금 대선 상황에 빗대어 악용하는 일부 패거리 정치인이야말로 국민을 이념과 진영으로 편 가르고 헐뜯게 하는 장본인”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이 ‘벽돌 책’의 진수는 유엔 10년을 회고한 1~4부에 있다. 팔레스타인 수단 리비아 이란 미얀마 스리랑카 아이티 등 세계 분쟁 지역과 재난지역을 누비며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평화를 위한 협상을 이끌어내려 분투했던 그의 모습은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도 극적이고 생생하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유엔 사무총장의 위대한 경험과 지혜, 강대국부터 분쟁국을 아우르는 방대한 글로벌 인맥을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자산으로 활용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터뷰는 ‘반기문 대망론’이 좌절된 2017년 스무 날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 권력 의지가 부족했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소위 ‘맷집’이 약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묶어서 다시 세계 일류 국가로 만드는 데 노력하는 그런 의지라면 나는 분명히 권력 의지가 있지만, 남을 헐뜯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정권과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것이 권력 의지라면 내게 그런 권력 의지는 없었다. <654쪽>
-한국판에 ‘나의 정치 참여’ 챕터를 추가하신 이유가 궁금하다.
“외무부 여권과 담당으로 시작해 유엔 사무총장까지 지낸 50년 공직 생활 동안 나를 헐뜯거나 비난한 사람은 없었다. 유엔 총장 시절 각국의 독재자와 싸울 때도 저속하거나 노골적인 표현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총장 마치고 귀국한 첫날부터 온갖 중상모략이 쏟아지더라. 사람이 그렇게 희화화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바보가 됐다. 나중에 법원 판결로 드러났지만 드루킹 세력이 비방 댓글을 쏟아내며 여론 조작을 한 결과였다. 선량한 시민이 아무것도 모르고 걸어가는데 요소요소에 복병을 해놓고 총을 쏴댄 셈이다. 공직자로서 내 50년 명예와 유엔의 명예가 무참히 훼손된 그 20일에 대해 한 말씀은 꼭 드려야겠다 싶어 책으로 썼다. 나라를 위한 충정 어린 마음에서 쓴 것이라 여겨달라.”
-공항 철도 티켓 구입 논란, 퇴주잔 논란, 박연차 뇌물 보도에 대해서도 상세히 해명하셨다.
“전차표 잘못 끊은 건 우스개에 불과하니 신경 안 쓴다. 하지만 내가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박연차씨에게서 20만불을 받았다는 보도는 참을 수 없었다. 시사저널이 적시한 문제의 그날은 저녁 6시 30분부터 베트남 외무장관과 만찬이 있었는데 박연차란 사람은 7시 30분이 돼도 나타나지 않다가 뒤늦게 도착해서는 ‘시시한 포도주 말고 폭탄주를 마시자’며 깽판을 부렸다. 내가 외교 만찬 자리에서 무슨 짓이냐고 역정을 냈는데, 그날이 박연차란 사람을 처음 본 날이다. 그런데 시사저널은 만찬 2시간 전에 박연차를 만나 내가 돈 봉투를 받았다는 기사를 나의 귀국일에 맞춰 보도했다. 외교부에 보관된 당일의 사진과 기록들을 과학수사연구소가 분석한 결과 그 보도는 엉터리로 결론났다. 국회 기자들에게도 자료를 주고 설명했는데 아무도 쓰지 않더라. 주위에선 형사소송 하라는데 유엔 총장까지 한 사람이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해서 검찰에 드나드는 게 말이 되나. 확인이 됐으면 그만이다 하고 접었다.”
반 전 총장은 퇴주잔 논란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집안 관례대로 첫 절을 올린 뒤 퇴주잔을 부친 묘소에 뿌렸고 두 번째 절을 올린 뒤 퇴주잔을 음복한 것인데 첫 절을 올린 뒤 퇴주잔을 음복한 것처럼 조작된 영상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고 썼다.
-’제례까지 정치 공작 수단으로 일삼는 것은 패륜’이라는 표현을 썼을 만큼 당시 정치판을 개탄하셨다. 2021년 현재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다른 게 없다. 분열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한 가지 경고가 됐다면, 드루킹 같은 조작은 이번엔 못 하겠지.”
-정치판이라는 게 어느 나라나 야만적이지 않을까.
“물론 그렇지만, 요즘 정치는 점점 더 저질이 돼가는 듯하다. 여러 대통령을 모셨지만 과거엔 여야 간에 인간적 예우가 있었다. 국회에선 날 선 말을 주고받더라도 저녁엔 타협하고 그다음 날엔 웃으며 만나 다시 정치가 굴러갔다. 지금은 국민을 두 파로 갈라서 싸움과 증오를 부추긴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그걸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정치인들 책임이 크다.”
-반기문에게 권력 의지가, 맷집이 좀 더 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 많았다.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내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았다. 남과 다투거나 치열하게 경쟁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촌에서 올라와 속칭 무슨 빽이 있나. 서울의 유명 고등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어서 학맥, 인맥도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유엔까지 왔는데, 잘한다 잘한다 소리만 듣다가 맷집이 없다고 하고, 저 바보 같은 놈, 돈 받은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웃음). 자존심이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그만둔 것이다.”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실까.
“그때도 우리 집 앞에 와서 지지자들이 결정을 번복하라고 시위를 했다. 요즘도 다시 출마하라 권하는 분들이 있고. 내 나이 곧 팔십이라고 하면 김대중 대통령도 네 번이나 번복했다며 상관없단다, 하하! 그러나 나는 말이 안 되는 걸 가지고 끝까지 우겨서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권 교체는 중요하지 않다, 정치를 교체해야 한다’고 하셨다.
“20일 동안 배운 게 그거였다. 권력을 누가 잡든 똑같은 짓을 하면 무슨 소용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정치 철학이나 능력을 보고 뽑지 않고 부정적인 면을 들춰내 떨어뜨리려고 드는 행태는 끝내야 한다. 국민이 이념화되면 안 된다. 건전한 시민 정신을 가져야 한다.”
#. 전 세계를 다니면서 분열이 그들 나라를 어떻게 실패의 질곡으로 몰아갔는지 생생히 목도했다. 정치 지도자, 특히 국가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사심을 내려놓고 국가 대통합에 솔선수범해야 한다. <640쪽>
-2017년 대선판에서 실수하고 공격받은 것에 비하면 내년 대선 주자들에게 제기된 의혹의 무게는 그 몇 배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니 억울할 것 같다.
“내게 만일 대장동 사건이 닥쳤다면 비리에 연루됐든 안 됐든 장(長)으로서 책임을 지고 벌써 그만뒀을 거다. 그런데 눈도 깜짝 안 하더라(웃음). 나는 그렇게 못 한다. 거짓말을 하거나 양심에 찔리거나 하면 금방 얼굴에 나타나서…. 외교부 장관을 하고 유엔 사무총장 하면서도 ‘권력을 좇는다’ ‘권력을 휘두른다’는 말은 나와 무관한 것이었다.”
-탈권위적이고 조용하면서도 소탈한 리더십으로 신뢰를 받았다.
“나의 멘토 중 한 분이 노신영 전 총리다. 내 첫 부임지인 인도에서 대사로 모실 때부터 총리 의전 비서관으로 일할 때까지 많은 걸 배웠다. 그분은 자주 당태종의 ‘정관정요’를 말씀하셨다. 거기 보면 아랫사람한테 잘 대하라, 그들의 말을 잘 들어라, 자기 고집 세우지 마라 같은 군주의 처세가 나오는데, 노 전 총리는 이게 공직자가 갖춰야 할 자세라고 강조하셨다. 구체적으로는 ‘편지를 받으면 답장을 꼭 해라, 우표도 직접 붙여라, 거기에 성의가 담긴다’고 하셨지. 사무총장 되고서도 내게 오는 편지와 이메일, 문자에 직접 답장하는 이유다. 그런 걸 노신영 총리에게서 배웠다.”
-책에도 노신영을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이자 존경받는 외교관이라고 썼다.
“전략적 마인드가 대단한, 아주 무서운 분이었다. 일례로 총리 관저에 밭을 일궈 농사를 지으셨다. 고추 장미 가지 오이 등을 수확했지. 농촌진흥청 학자들에게 농법을 배워가면서. 그게 당신은 정치에 뜻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메시지였다. 삼엄한 군사 정부, 전두환 정권 시절 아니었나. 대통령 후계자로 노태우와 함께 자꾸 자기 이름이 거론되니 신문이나 방송에 자기 이름이나 사진이 일절 못 나오게 공보 비서관을 단속했다.”
-그런 인연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 빈소에도 조문을 가신 건가.
“노신영 총리와 아주 가깝게 지낸 대통령이었고, 내가 총리 의전 비서관을 하면서 청와대로 심부름 다니느라 아들들도 자주 봤다. 죄가 있는 분이지만 용서 여부를 떠나 인간적 애도를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겸허해야 한다.”
-반기문을 외교부 장관에 임명하고 유엔 사무총장에 도전하도록 지원한 노무현 대통령도 각별할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외교 보좌관으로 임명장 받는 날 처음 뵈었다. 그날 대통령, 문희상 비서실장,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과 나, 넷이서 점심 식사를 했는데 대통령이 대뜸 ‘우리가 전에 본 일이 있습니까?’ 물으셨다. ‘없습니다’ 했더니 ‘다들 당신을 장관 시키라고 하던데 내가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라더니, ‘누가 압니까? 다음에 할지’ 하시더라. 마음에 있는 걸 거침없이 말하는 분이란 걸 그때 알았다.”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도 했다던데.
“설화(舌禍)와 관련해서(웃음). 말씀은 재미나게 참 잘하시는데 사람을 가려서 하시면 좋겠다, 대통령을 지냈거나 총리나 외무장관인 사람들은 고민거리가 다들 비슷하니 흉금 터놓고 속내를 털어놔도 되지만, 국회의원 언론인 학자들에게는 절대 본심을 말씀하시면 안 된다, 입에다가 마이크를 하나씩 물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말씀드렸다(웃음). 민감한 질문에는 요대로만 읽으시라 적어드리는데 그 약속 못 지킨 날엔 나를 흘끗 쳐다보며 빙그레 웃으셨다.”
-대통령의 족집게 과외 선생, 만물 박사라는 소리도 들었다.
“유엔 총장 마친 뒤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다는 몰라도 조금은 안다. I Know Something About Everything. 사무총장 초기에 엄청 고생한 덕분이다. 의사 과학자 지리학자 기후학자들을 만나야 하는데 내 사정은 안 봐주고 전문용어를 막 써대니 등에 식은 땀이 흐르더라. 몇 년 지나니 자신감이 생겼고, 이젠 어떤 직종 어떤 사람을 만나도 아는 척을 할 수 있게 됐다. 뭐든 조금씩 알아두면 편리하다(웃음).”
#. “사과가 입으로 떨어질 때까지 나무 밑에 누워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나무를 흔들어야죠. 성명이야 100번이라도 발표할 수 있지만, 내가 방문하는 것만큼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 <346쪽>
-현안을 여쭙겠다. 지난달 30일 한미 동맹 콘퍼런스에서 “문재인 정부의 종전 선언은 북에 미군 철수 주장의 명분을 줄 것”이라 비판하셨다.
“사실 정치 문제엔 말을 아끼는데, 두 가지는 비판하고 싶다. 하나는 탈원전, 또 하나는 종전 선언이다. 북핵 협상 당사자로 남북문제를 오래 다뤄본 나로서는 순서가 완전히 잘못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비핵화라는 어마어마한 숙제가 안 풀리고 있는데 종전 선언을 집어넣는 게 무슨 소용인가. 이미 ‘9·19 군사 분야 남북 합의서’에서 종전 선언 비슷한 걸 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까지 최소 8번(트럼프 포함)에 걸쳐 북한 지도자들과 정상회담도 했다. 그중에서 제대로 이뤄진 게 뭔가. 평화적 교류, 비핵화 약속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마당에 종전 선언? 언론이 얘기하는 정치 쇼밖엔 안 된다. 북한은 안보리 결의도 안 지키고 여전히 제멋대로 하는데 우리 국민들 자존심은 생각 안 하나. 대통령은 유한하고 국민과 국가는 영원하다. 당장 북한에 좋은 구실만 준다. 종전했는데 왜 유엔사가 필요하냐며 해체를 요구할 것이다.”
-새로 선출될 대통령은 북한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원칙을 지켜야 한다. 북한에 끌려다니며 애걸복걸하는 형국이 되어선 안 된다. 좀 당당하게 하자. 천안함에 대해서 왜 말을 못 하나? 고립될수록 북한만 손해 본다. 나는 북한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의심한다. 누구도 동독이 그렇게 빨리 망할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중국의 인권 탄압을 문제 삼아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미국 호주 일본 영국 프랑스 등이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다. 총장님은 IOC 윤리위원장으로 올림픽에 간다고 발표했던데.
“내가 올림픽에 간다는 게 언론의 주목을 끌던데, 나는 IOC 윤리위원장이니 보이콧과 상관없이 당연히 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미중 관계로 우리 처지가 난처해졌다는 거겠지.”
-청와대는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는다고 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중국에 인권 문제를 개선하라고 나서서 얘기하기는 여러 가지로 어려울 것이다. 다만 나는 한중 관계가 문재인 정부 들어 ‘전략적 협력 동반자’로 격상은 됐지만, 거기 걸맞은 협력 관계가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처음부터 스탠스를 잘못 잡았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사드에 반대했고, 대통령이 된 뒤엔 박근혜 정부가 이미 배치한 사드 환경 조사가 엉터리로 이뤄졌다며 재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연달아 하니 다시 사드를 유지하기로 번복한다. 중국으로선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거지.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했다.”
-한중 관계에 묘안이 있을까.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 불필요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중국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 된다. 한미 동맹은 1953년부터 이어져온 것이고, 6·25 일으키고 핵무기 개발하며 늘 도발해온 쪽은 북한이다, 따라서 한미 동맹은 타협 대상이 아니고, 사드가 싫으면 너희가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더 이상 도발하지 않고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하라는 식으로 중국에 부담을 지워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문재인 외교 정책의 한복판에 총장님이 발탁한 강경화 장관이 있다.
“뭐, 여러 가지로 강 장관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업적 같은 것도 공평하게 봐야 한다. 강 장관 잘못은 아니지만 최악의 상황이 된 한일 관계만 해도 지혜를 발휘해야 했다. 한일 정부 간에 합의한 공식 문서를 뒤집는 건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식민지 문제 없는 나라가 많지 않다. 우리보다 더 심한 곳도 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이런 얘기를 했다. ‘과거는 여는 게 아니고 닫는 것이다. 미래를 여는 것이다.’ 만델라가 28년 만에 석방돼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그는 전임인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대통령을 부통령에 임명했다. 우리 같으면 감옥에 다 잡아넣을 텐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만델라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남을 용서하고 통합할 수 있나’ 묻자 만델라가 답했다.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나와 함께한 수천 명이 이뤄낸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있는가.”
#.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만나본 케네디는 누구보다 멋지고 강인한 원칙주의자였다. 그가 “한국!”이라고 외치던 순간 나는 심장이 터질 듯한 감동을 느꼈다. 거기서 케네디는 영원히 내 가슴에 각인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도움의 손길을 뻗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의 연설은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34쪽>
‘반기문 결단의 시간들’의 백미는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포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던 전쟁을 겪은 뒤 전란의 폐허에서 유니세프가 배급하는 식량으로 허기를 채우고 유네스코가 제공하는 교과서로 공부하며 자란 소년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돼 세계 분쟁 지역을 누비며 써내려 간 생생한 기록에 있다. 바그다드 기자회견 도중 로켓이 날아들었던 순간, 가자지구의 폭격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 백린 가스 날리는 폐허에서 평화를 호소했던 순간, 리비아 유엔 대사가 안보리 연단에 서서 “제발 우리 리비아를 독재와 내전에서 구해달라!”며 울부짖던 순간, 우여곡절 끝에 ‘파리 기후변화 협약’을 이끌어내며 얼싸안고 환호하던 순간 등 유엔 10년의 파란만장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반기문은 “지나고 보니 이것이 유엔의 산 역사였다.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전직 사무총장으로서 후대 정치 지도자들과 유엔 직원들에게 교훈을 주겠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썼다”고 했다.
-유엔평화유지군 관리 부실, 코펜하겐 기후변화 회의 실패 등 뼈아픈 반성도 담겼더라.
“내겐 쓴 약이 됐다. 특히 코펜하겐 회의는 완전한 참패였다. 그렇게 망신스러웠던 적이 없다. 2007년 사무총장에 취임해 과욕을 부린 결과였다. 미국과 중국이 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지. 그때부터 정말 집요하고 끈질기게 세계 정상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충주고등학교 시절 워싱턴에서 열린 청소년적십자국제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대목도 흥미로웠다.
“내가 유엔 사무총장이 될 거란 소문이 돌고 어릴 때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이 보스턴의 케네디 도서관에 가서 그게 사실인지 자료를 찾아봤다더라. 그리고는 60년 전 케네디 연설문과 함께 흑백사진을 넣어 ‘JFK meet JFK’이라고 써서 내게 선물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연수할 때 내 별명이 JFK였다. 자기소개를 하라길래 나는 ‘JFK다. Just From Korea’라고 했다(웃음).”
-미얀마 군사정권의 독재자 탄 슈웨가 ‘은퇴하면 박정희 같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자, 쓴소리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더라.
“당신은 유엔 총장을 1주일씩이나 기다리게 하며 안 만나줬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고립주의자가 아니었다, 기자도 만나고 외국인도 만나고 다른 나라도 여행하는 등 모든 게 오픈돼 있었다, 독재는 했으나 경제 발전에 일념해서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다, 당신이 박정희처럼 되려면 통치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일갈했다(웃음).”
-유엔 총장 시절 업적 중 하나가 파리 기후변화 협정 체결이다. 총장님은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지만, 많은 저항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의 가장 든든한 동맹자였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은 누구나 언제든지 용서를 하고, 인간은 때때로 용서한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자연은 그 나름의 법칙이 있다. 자연이 가는 길을 인간은 협상할 수가 없다. 자연이 주는 경고를 경청하고 여기에 대응해야만 한다. 기업들을 비롯해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이걸 해나가지 않으면 인류에 대재앙이 닥친다.”
-카리스마가 없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각국 정상은 반기문을 매우 집요한 사람으로 회고한다.
“기후 협약 때문에 부시도 쫓아다니고 오바마도 G7, G20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쫓아가 설득을 해댔더니, 오바마가 수전 라이스에게 ‘아, 저 범생이 같은 친구 때문에 내가 댄스 파티에 끌려가는 여학생이 됐다’며 혀를 내두르더란다(웃음). 자서전에 ‘그래서 반기문이란 사람을 존경하게 됐다’고 써서 감사했다.”
-막내딸 현희씨가 아버지 뒤를 이어 유엔, 유니세프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다.
“연세대 정외과를 나왔는데 상당히 도전 의식이 강하다. 연세대가 교육을 얼마나 잘했는지 내가 뭘 잘못하면 막 대든다(웃음). 청와대 수석 시절, 명절에 과일이 들어오면 딸애가 이거 보낸 사람과 잘 아느냐고 묻는다. 청와대에 있으면 다들 보낸다고 했더니 ‘말이 안 된다. 당장 돌려보내라’고 난리를 치더라. 총장 시절에도 근무지인 유니세프 케냐 사무소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유엔에서 일하는 한국 직원들과 오찬을 한다는 일정이 공개됐는데, 딸이 유엔에 ‘한국 직원만 있냐, 베트남 인도 다 나와 있는데 그들에게도 밥을 살 거냐, 아빠는 유엔 총장이지 한국 총장이 아니다’ 하면서 혼내더라(웃음).”
-남편이 인도 사람이라던데.
“내가 인도와 인연이 깊다. 첫 부임지가 인도였고, 거기서 아들을 낳았고, 막내 현희는 인도 남자와 결혼했다. 처음엔 반대했다. 한국에서 외교부 장관 할 때 날 만나러 그 친구가 왔는데 차갑게 대해서 돌려보냈다. 편견이었지. 그러자 딸이 달려오더니, 유엔 총장 하겠다는 아빠는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만일 내 결혼을 반대하면 아빠는 절대 사무총장이 될 수 없다며 협박을 하더라. 하하!”
-책을 보니 반기문이 가장 잘한 두 가지 선택 중 하나가 유순택 여사와 결혼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알게 된 아내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싫은 얘기, 잔소리를 거의 안 한다. 내가 그렇게 신의를 배반한 일이 없기도 하고(웃음). 말도 거의 없어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을 때 아프리카 감염 피해 현장으로 떠나는 내게 아내가 한 말은 ‘조심하세요’가 전부였다.”
반기문은 회고록에 “나의 대선출마 포기를 지지한 사람은 아내가 유일했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