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일대의 한 편의점. 밤 10시 수업이 끝나자 쏟아져 나온 학생들이 서서 컵라면을 먹고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26일 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일대. 밤 10시가 되자 건물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요했던 거리는 금세 북적거렸고,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연령대는 다양했지만 먹는 음식은 비슷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이들은 ‘몬스터’ ‘핫식스’ 같은 고카페인 음료와 삼각김밥, 치킨을 들고 있었다. 서서 컵라면을 먹는 학생도 많았다. 친구 둘과 닭강정을 먹던 초등학생 이모(12)군은 외고 준비반 수업을 마치고 출출해 밤참을 먹는다고 했다.

낮에도 마찬가지. 학교가 파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오후 5시 전후에도 편의점은 붐빈다. 분식집에서 파는 덮밥 따위를 먹을 수도 있지만 조리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파는 냉동 부리토, 초코칩, 바나나 우유 등으로 배를 채운다. 대치동의 한 편의점 점주는 “초콜릿, 젤리, 달콤한 간식을 찾는 학생이 많아 아예 당류 매대를 입구 앞에 배치했다”며 “아이들이 모두 길어야 7분 이내로 식사를 끝내서 신기할 지경”이라고 했다.

10대들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서울시교육청이 12일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에게 제출한 2017~2021년 학생 건강 검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서울 지역의 초등학교 4학년생 5명 중 1명, 중학교 1학년생 6명 중 1명이 고혈압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기간 배달 음식 등 자극적인 음식과 각성 음료를 먹기 쉬운 환경이 된 탓”이라고 지적했다. 편의점 음식 섭취는 일상이 됐다. 인스턴트 식품, 패스트푸드, 고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식습관이 비만은 물론, 고혈압 등 만성 질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카페는 그나마 여유 있는 아이들이 선택하는 장소다. 대치동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는 공부하면서 식사하는 학생들로 30여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영어 단어장을 보며 중얼거리는 학생부터 케이크와 크림이 올라간 음료를 먹으며 수학 문제를 푸는 아이들까지 모두가 바빴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수학 문제를 풀던 이주빈(18)양은 “학원 오는 날 식사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로 해결하거나, 제과점 빵을 사 먹는다”고 했다.

부모들은 고카페인 음료를 걱정한다. 에너지 음료는 최소 3시간 이상 이어지는 학원 수업에서 잠을 몰아내기 위한 ‘총알’이다. 씁쓸한 아메리카노 맛에 일찌감치 빠져드는 학생도 적지 않다. 10분 쉬는 동안 짬을 내 편의점에서 치킨을 먹던 고등학생 김리우(16)군은 “중간·기말고사 기간엔 새벽 2시까지 깨어 있어야 하니 몬스터나 핫식스를 어쩔 수 없이 마신다”고 했다. 에너지 음료 시장 규모는 코로나 기간 급성장했다. 시장조사 기관 닐슨에 따르면 자양 강장제를 제외한 국내 에너지 음료 시장은 1800억원대로 2019년부터 연간 30% 이상 성장한 것으로 조사됐다. 오한진 을지대 가정의학과 교수는 “카페인이 일으키는 각성 상태에 중독되면, 섭취하지 않을 때 뇌가 멍해지는 증상을 보일 우려가 있다”며 “당분 함량도 높아 하루 권장 섭취량의 절반을 웃도는 분량이 한 캔에 들어있다”고 지적했다.

양혜란 분당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배달 음식을 먹거나 외식할 때 아이들이 고르는 음식은 분식, 패스트푸드, 과자, 음료수, 아이스크림 같은 고지방, 고열량, 고나트륨 음식이라 비만으로 직결된다”며 “늦은 시간에 고열량 음식을 먹고 살이 불어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비만 클리닉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이영우 한양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외식하거나 배달 음식을 먹는 경우, 하루 권장량인 2000mg을 웃도는 나트륨을 섭취할 수 있다” 며 “맵고 달고 짠맛에 익숙해지면, 혀가 일종의 마비 상태에 빠져서 나물·채소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풍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실제로 자극적 음식에 길들여진 자녀 때문에 부모들은 속을 태운다. 중2 딸을 둔 김희정(52)씨는 “아이가 학원 가기 바빠 편의점 간편식과 매운 떡볶이를 즐겨 먹더니 입맛이 달라졌다”며 “주말에 집에서 밥을 먹을 때도 밥과 반찬이 아니라 불닭볶음면, 마라탕 같은 걸 찾는다”고 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류지영(45)씨는 “도시락이라도 싸줘야 하나 싶지만, 학원에 먹을 공간이 없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결국 편의점 가는 걸 두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10대 비만과 만성 질환의 증가가 장기적으로 성인병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박소원 세브란스병원 소아소화기영양과 교수는 “어린 나이의 비만은 지방 세포 수를 늘려 성인 비만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한창 일할 20·30대에 대사증후군, 심혈관계 질환, 지방간 등 각종 합병증을 앓을 위험도 높다”고 했다. 실제로 ‘젊은 노인성 질환자’도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민주당 최종윤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2만6808명이었던 20대 당뇨병 환자는 지난해 3만7926명으로 41% 증가하고, 같은 기간 3만586명이었던 20대 고혈압 환자는 3만8536명으로 26% 증가했다.

해법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식습관 개선을 위해 사회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학생들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원 생활이 사각지대에 놓였다”며 “학원에서 학생들이 학습권과 식사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조례나 법을 마련해 관리·감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양혜란 교수는 “성인은 건강 검진에서 발견된 문제점이 진료로 곧바로 이어지는데, 청소년은 학교와 교육부에서 건강 검진 자료를 관리해 진료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라며 “청소년 건강 검진 자료가 지역사회 의료 기관과 연계되도록 예산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영우 교수는 “가공식품에서 몸에 악영향을 끼치는 성분은 더 눈에 띄도록 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