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공연 시장인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현재 관객 수와 매출, 문화적 영향력에서 정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뮤지컬은 ‘해밀턴(Hamilton)’이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주인공으로 세워 18세기 미 독립혁명과 건국 과정을 그린 대하 사극으로, 브로드웨이 사상 최고 흥행작이자 미국인들 사이에 역사 배우기 열풍까지 일으킨 화제작이다.
이 뮤지컬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의 아내이자 여주인공인 일라이자 해밀턴 역을 지금 한국계 배우가 단독으로 맡아 끌어가고 있다. 한국계 이민 2세 스테파니 박(30·한국명 박주희)씨다. 그는 지난 11일(현지 시각)부터 뉴욕 맨해튼의 97년 된 정통 극장 로저스 리처드 시어터에서 주 8회 ‘해밀턴’ 무대에 올라 2시간 40분씩 공연 중이다. 1년 이상 이런 공연 강행군을 이어갈 예정이다. 최근 박씨를 만나 뮤지컬 ‘해밀턴’의 성공 신화, 그리고 브로드웨이에서 여전히 마이너리티(minority·소수자)인 아시아계 여배우로서 주연급 배우로 성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브로드웨이 최고 뮤지컬에 주연급으로 선 소감이 궁금하다.
“뮤지컬 배우를 10년 가까이 했지만, 내 인생 최고의 데뷔였다.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고 내면 가득한 충만함을 느끼면서, 집중해서 연기하고 노래했다. 무대 위 동료들과 호흡도 너무나 잘 맞았고 제작진과도 한 치 오차 없이 소통하면서, 관객들 표정까지 확인해가며 무대를 펼쳤다. 이렇게 잘 준비된 상태에서 최고 작품을 하게 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일라이자(Eliza) 역을 얼마나 오래 준비해왔나.
“브로드웨이가 모든 뮤지컬 작품의 최고 제작·출연진이 만드는 최고 등급 무대라면, 미국 내 다른 지역을 도는 내셔널 투어, 외국에서 하는 인터내셔널 투어 등도 있다. 나는 이미 지난 1년여간 해밀턴의 내셔널 투어팀에서 일라이자 역을 맡았다. 그래서 브로드웨이 일라이자 오디션에서 제작진이 별 이견 없이 나를 선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무대만 달라졌을 뿐 이미 꿈속에서도 연기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역할이기 때문에, 브로드웨이에 선다고 해서 더 떨리는 건 아니다. 물론 브로드웨이 본공연 무대에 선다는 건 배우로서 내 미래의 문을 더 활짝 열어주는 열쇠가 될 것 같다. 매우 기쁘고 흥분된다.”
‘해밀턴’이 어떤 위상의 작품인지는 우선 ‘돈’이 말해준다. 박씨가 나오는 브로드웨이 ‘해밀턴’의 표는 현재 주말 가장 좋은 자리가 2000달러(285만원) 정도다. 브로드웨이 유명 뮤지컬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높은 가격이다. 그것도 내년 2월까지는 대부분 매진 상태다. 2015년 초연 이후 이듬해 브로드웨이에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해밀턴 표 구합니다’란 팻말을 든 사람들이 등장할 정도로 표가 품귀 현상을 빚어 암표가 5000달러(약 713만원)까지 치솟은 적도 있는데, 지금도 2500달러 선에서 암표가 거래된다고 한다.
해밀턴의 매출은 지난 7년여간 브로드웨이에서만 관객 260만명을 동원하며 6억5000만달러(약 9275억원)를 올렸고, 미국 타 지역과 영국·호주 투어팀까지 합하면 10억달러(약 1조4270억원)를 넘겼다. 브로드웨이뿐 아니라 공연 예술의 판도를 뒤집은 사상 최고 히트작이다. ‘해밀턴’은 2016년 토니상 11부문 수상, 그래미상과 퓰리처상까지 휩쓸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작품 전체를 아예 백악관으로 초청해 공연케 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는 “내 평생 걸쳐 접한 모든 형식의 예술 작품 중 단연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다.
‘해밀턴’엔 미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총출동한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3대 토머스 제퍼슨, 4대 제임스 매디슨에 걸쳐 독립 전쟁부터 미 건국 초기 정치·경제·사법 체계 구축을 둘러싼 각종 논쟁과 사건이 전문용어로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이 중 알렉산더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이자 초대 재무장관으로, 현 연방준비제도(Fed) 등 강력한 연방 중심 경제 체제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미국 금융의 아버지’라는 해밀턴의 조각 같은 얼굴은 10달러 지폐 속 초상화로 남아있다.
일라이자는 일명 ‘건국의 어머니’ 중 한 명으로, 일곱 자녀를 함께 낳은 남편이 40대에 결투 끝에 죽은 뒤 반 세기를 더 살며 그의 유산을 세상에 알리고 발전시킨 인물이다. 워싱턴 DC의 내셔널몰 조성 기금 모금을 주도했고, 뉴욕엔 일라이자가 미국 최초로 세운 보육원이 아직 운영 중이다. 뮤지컬에서도 남자들의 격정 속에서 유일하게 감정선의 중심을 잡으며 인내와 헌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해밀턴의 진정한 영웅은 일라이자’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해밀턴’은 미국 역사를 잘 알아야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대중적으로 흥행했을까.
“사실 미국인이나 영어 원어민 관객도 공연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더라.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 외에선 영국·호주 정도에서만 공연이 이뤄졌고, 최근 비영어권에선 독일에서 처음 공연을 시도했다. 나 역시 미국인이지만 ‘해밀턴’을 만나기 전까지는 미 역사를 그리 속속들이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역사를 풀어가는 독특한 전개 방식이나 완성도 높은 음악과 춤만 봐도 충분히 즐길만할 것이다.”
박씨 말대로 ‘해밀턴’의 성공은 무겁고 고루하게 느낄 수 있는 역사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란 평가가 많다. 첫째, 18세기 복식을 갖춰 입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힙합과 랩, 리듬앤드블루스(R&B), 재즈 등 귀에 팍팍 꽂히는 현대 음악 장르로 헌법 제정과 중앙은행 설립에 관한 논쟁과 고뇌를 풀어낸다. 역사 인물이 운율에 맞춰 속사포 같은 랩을 쏘아대는 건 정통 뮤지컬에 없던 새로운 문법이다.
둘째는 유럽계 백인 남성이 주도했던 미국 18세기 역사물에 배우를 전원 ‘비(非)백인’으로 캐스팅하도록 명시해뒀다는 것이다. 단 한 사람, 악역인 영국 조지 왕만 빼고서. ‘해밀턴’의 극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초대 주연을 맡았던 린 마누엘 미란다(42) 역시 푸에르토리코계 이민자다. ‘21세기 미국 문화계의 총아’라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미란다는 ‘해밀턴’ 제작 모토를 “그때의 미국 역사를, 지금의 미국이 이야기한다”는 것으로 잡았다. 다양한 인종과 이민자가 만들어가는 미국의 현재가 곧 역사이며, 살아 숨 쉬는 역사로 미 건국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 알렉산더 해밀턴은 건국의 아버지 중 유일하게 미국 밖(중미 서인도제도)에서 태어난 사람이자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미란다는 “해밀턴의 삶이야말로 힙합 그 자체”라고 했다.
-아무리 ‘비백인 캐스팅’이라도 아시아계가 주연급에 발탁되기는 어렵지 않은가.
“일라이자 해밀턴의 원조 캐스팅은 필리핀계 유명 배우 필리파 수였다. 이후 아시아계는 내가 처음이고, 다른 주요 출연진 중에도 한국계를 포함한 아시아계는 거의 없었다. 사실 브로드웨이에서 아시아계의 입지는 매우 좁다. 나도 ‘왕과 나’ ‘신데렐라’ ‘미스 사이공’ 등 여러 뮤지컬에 출연했지만, 아시아계 여배우가 받는 역할은 제한적이다. 브로드웨이가 요즘 다양성의 가치를 강조해도, 이 업계를 움직이는 건 여전히 백인 남성이다.”
박씨는 미국령 괌에서 교육 관련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성악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 땐 콜로라도주에서 성장했다. 박씨는 “20여 년 전 백인밖에 없는 콜로라도에서 아시아계 소녀로 자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어릴 때부터 무대에 서는 훈련을 해왔지만, 나 같은 사람을 무대에서 실제 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환경에서 내 재능과 열정으로만 평가받으려면 방법은 단 하나였다. 무조건 하드 워커(hard worker·열심히 하는 사람)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박씨는 어릴 때부터 성악과 피아노, 발레, 연기 등 각 분야를 맹훈련하며 브로드웨이 진출에 인생을 바치다시피 했다. 고교 때 자신이 주도해 창단한 교내 합창 앙상블을 이끌기 위해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다고 한다.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성악과(소프라노)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뮤지컬 배우의 길을 확정하고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대로 옮겼다.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에서 사는 그의 일과를 들어보니 화려한 여배우보다는 수도승의 삶에 가까웠다.
“연기, 노래, 춤을 정기적으로 계속 강습받는다. 체력과 건강이 중요하기 때문에 매일 근육·유산소 운동과 엄격한 식단 관리를 한다. 잠은 반드시 8시간 잔다. 목을 아끼기 위해 식당이나 술집에도 안 가고, 잡담도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생활이 없다.(웃음) 공연을 시작하면 극도의 ‘에너지 보존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에 연락이 잘 안 될 거다.”
‘해밀턴’ 제작팀은 내년 이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공연을 타진하고 있다고 한다. 박씨는 “만약 아시아 투어가 결정되면, 브로드웨이를 포기하고서라도 부모님의 나라에 공연하러 갈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