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cel
Cancel
live

백년고독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다녀오는 길입니다. 찬바람을 뚫고서.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마음이 급해져 벌떡 일어났습니다. 가는 동안, 다 팔렸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과 어쩌면 나를 위한 마지막 한 병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수시로 교차했고요. 불안과 희망이 들숨과 날숨처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술꾼들에게는 전설 속의 술이라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백년고독은 술입니다. 백년고독이라니. 백년고독이 술 이름이라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술을 좀 알고 글도 좀 아는 분이라면, 그래서 백년이라는 말에 담긴 아득함과 고독이라는 단어 깊이 잠복한 희미함에 대해서 느끼는 분이라면 마음이 좀 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독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분일지라도 고독이라는 말이 당신도 모르게 가졌던 어두움을 길어 올릴지도 모르겠고요.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이름을 따온 동명의 일본 소주. /라쿠텐닷컴

제가 그렇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평소와 다르게 경어체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단어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저절로 양손을 모으게 하는. 백년고독에 대해 처음으로 들은 것은 술에 대한 책에서였습니다. 술과 사람이 함께 흐르는 그 책을 읽으며 저는 많은 술들을 알게 되었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분의 술자리를 부러워했었는데요. 시간이 꽤나 흐른 지금 저는 미지였던 그 술들을 여럿 만났고, 또 좋은 사람들과 함께 그 술들을 마시고 있습니다.

신기할 따름입니다. 하늘 아래 저 혼자인 것만 같고,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고독하기 그지없었을 때도 있었는데요.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 신기한 일은요, 술에 대한 그 책을 쓰신 분을 어느 날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분과 술을 함께 마시기도 하고, 그분이 빚으신 술을 보내주시기도 합니다. 아, 그 책에서 백년고독은 이렇게 등장합니다.

“이름만으로 이미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술이 있다. 백년고독! (…) 중국 백주 중에 ‘백년고독’이라는 술의 존재를 알고 몇 번을 마시려 했으나, 아직 마시지 못했다. (…) 마셔보지 못하고, 상상만 하는 술이기에 백년고독은 소맥과 고량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고독하라!’는 문구처럼 스스로가 선택한 유배와 단절, 침묵으로 빚어진다.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백 년, 아주 오랜 시간 수많은 감정과 언어, 삶으로 빚어진다.”

‘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이라는 책입니다. 이 글을 읽다가 알았습니다. 백주는 소맥과 고량으로 빚어진다는 것을요. 소맥은 소주와 맥주를 섞은 걸 지칭하는 게 아니라 밀이고, 고량은 수수라는 것을요. 중국어로 대맥은 보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작가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셔도 좋겠지만 마시지 않아도 좋겠다고. 백년고독이라는 술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겠다고요.

왕가위의 영화 <동사서독>에 나오는 술 취생몽사처럼요. ‘취한 상태로 살다가 꿈꾸듯 죽는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난 일을 잊게 해준다는 영화 속 술의 이름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참 부럽습니다. 술의 이름이나 향수의 이름을 짓는 분들, 그리고 술과 향수에 대한 테이스팅 노트를 적는 분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공중에 잠시 퍼질 뿐인 향기에 대해 붙잡으려고 시도하는 그분들의 일이 경이롭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백년고독이 떨어질까 봐 다급히 달려간 그곳에는 다행히 백년고독이 있었습니다. 백년하고도 고독이 보존되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해졌습니다. 그저 술 이름일 뿐인데, 백년과 고독을 붙여놓으니 자못 센티멘털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감상적인 사람이 좀 힘든데, 저런 걸 보고 있자니, 술병 안에 백년의 고독이 든 것 같고, 그래서 마치 대단한 인생의 비기를 받아든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산 술은 백년고독이 아니었습니다. 백년의고독(百年の孤獨)이었습니다. 햐쿠넨노고도쿠. 백주가 아니라 일본 소주였습니다. 쇼츄라고도 하는. 소맥과 고량이 아닌 보리와 보리누룩으로 만든 술이라고 라벨에 써 있었습니다. 대맥을 증류해 만든 고독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은요. 중국의 백주인 백년고독과 일본 소주인 백년의고독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둘 다 베이지색 종이로 술병이 쌓여 있고, 라벨은 조니워커처럼 사선으로 붙어 있습니다. 백년짜리 고독은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무의식적 공감대가 있었던 걸까요? 눈앞에 백년의고독을 둔 채로 스마트폰으로 백년고독을 찾아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저처럼 백년과 고독이라는 단어에 홀린 이들의 후기를 읽었습니다. 백년과 고독의 맛을 궁금해하는 이들의 후기를요. 어딘지 상기되어서 이 술을 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또 먹어본 후에 이 술의 맛에 대해 서술하는 분들의 글을 읽으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귀여우신 분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고독한 것입니다. 모두가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무게와 각자의 시간을. 그러니까 이 술을 그토록 마시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백년의고독은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이 소설이 일본에 번역되어 출판된 게 1985년이고, 그 해가 백년의고독을 만든 해이고, 또 양조장 구로키혼텐이 100주년 된 해이기도 해서 그렇다고요. 술이 오크통 속에서 갇혀 숙성되는 시간이 고독하게 느껴진다는 의미도 담았다면서요. 중국의 백주인 백년고독도 이 소설에서 이름을 따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고독을 글렌캐런 글라스에 따랐습니다. 위스키와 양조 기법이 비슷해 보여서 위스키 잔이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소주를 ‘화이트 스피릿’이라고도 하는데, 이 술은 ‘옐로우 스프릿’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오크통에 오래 담겨 있어서 그런지 옅은 나무색이 돌았거든요. 처음에는 스트라이트로, 다음에는 물을 살짝 타서 풀어지게 해서, 그 다음에는 물을 반쯤 타서 미즈와리로 마셨습니다.

그리고 향에 대하여. 말려서 더 진해지고 적나라해진 꽃 냄새가 났습니다. 맛은, 너무 달콤해서 놀랐습니다. 쓴맛은 전혀 없이 진득한, 시간이 증류되어 만들어낸 달콤한 이 술을 마시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런 초현실적인 달콤함은, 백년의 고독 이후에 오는 안식일까라고요. 인생이 써야 술이 더 단 거 아니겠습니까.

고독은 이왕이면 진한 게 좋은 듯합니다.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 가장 좋았습니다. 고독의 농도는 100%가 적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