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부산의 한 공무원 필기시험장. 할아버지의 생각대로라면, 정유정(23)은 이날 여기서 시험을 치고 있어야 했다. 그는 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유정은 또래 여성을 잔인하게 살인한 죄로 구치소에 있었다.
<”그가 살인을 해서 충족되는 게 뭐지? 사람은 매일 보는 것에 탐욕을 느끼지.”-영화 ‘양들의 침묵’->
정신과 의사이자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한니발 렉터는 FBI 연수생 클라라스 스털링(조디 포스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다. 살인도 마찬가지다. 정유정은 왜 그 여성을 죽였을까. 전문가들과 분석했다.
◇신분 탈취 노렸나
‘시신 없는 살인’, ‘살인 사건’….
올해 초부터 정유정은 휴대폰으로 이런 단어들을 검색했다. 도서관에서 범죄 소설을 빌려 읽었고, 범죄 수사 TV 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그에게 범죄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인기 선생님. 대학교 △△학과. 성격은 ◊◊합니다.”]
살인 충동을 느낀 그는 범행 대상을 과외앱으로 찾았다. 학부모 회원으로 가입해, 자신을 중학교 3학년 딸을 둔 엄마라고 속였다. “영어가 부족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러다 지난달 24일 피해자와 대화를 나눴고, 그가 “거리가 멀다”며 과외를 거절하자, “아이를 선생님 댁으로 보내겠으니 상담해달라”며 요청했다. 그 전까지 둘은 일면식도 없었다고 한다.
지난달 26일 정유정은 중고앱에서 산 교복을 입고 피해자의 집을 방문했다. 그가 혼자인 것을 확인하곤 교복 속에 숨긴 흉기로 찔렀다. 이날 오후 5시 30분쯤 피해자 집을 나와 마트에 들러 시신을 처리할 큰 비닐봉지와 세제, 훼손 도구 등을 샀다. 자신의 집에 들러 시신을 담을 여행용 가방을 챙기기도 했다. 다시 피해자의 집으로 돌아온 정유정은 시신을 훼손했고, 일부를 가방에 담은 후, 피해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정쯤 정유정은 시신을 유기하기 위해 가방을 들고 피해자의 집을 나섰다. 27일 오전 3시쯤 택시를 탔고, 자신이 평소 산책하던 경남 양산 낙동강변 풀숲에 시체를 버렸다. 그러면서 피해자의 휴대폰과 신분증, 지갑 등은 따로 챙겼다. 마치 실종된 것처럼 보이려고 한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 부분에서 “신분 탈취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검거되지 않았다면 피해자인 양 그 집에서 생활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피해자는 온라인에서 인기 있는 과외 교사였다”며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려는 방법으로, 이 여성의 정체성을 훔치려 한 것 같다”고 했다.
<”초라한 현실보다 멋진 거짓이 낫다.” –영화 ‘리플리’>
리플리 증후군이란, 마음속으로 꿈꾸는 세계를 위해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뜻한다. 성취 욕구가 강한 개인이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을 때 많이 발생한다.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던 톰 리플리가 재벌의 아들인 친구를 죽이고서,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유래했다.
이수정 교수는 “정유정의 목적이 단지 살인이었다면, 피해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신분증과 휴대폰, 지갑을 챙기는 등 완전 범죄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을 것 같지 않다”며 “살인 이유가 평상시 자기가 열등감이 있었던 ‘영어를 잘하는 명문대생’이라는 것을 충족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드라마 ‘안나’->
정유정은 27일 오전 3시 15분 “여행용 가방을 끌고 풀숲으로 들어가는 수상한 여성이 있다”는 택시 기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이때부터 그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
경찰이 여행용 가방에 혈흔이 묻은 것을 보고 추궁하자 그는 “하혈을 했다”며 복통을 호소했다. 경찰은 그를 병원에 데려가 산부인과 검사를 했지만, 하혈은 거짓이었다. 그는 “피해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피해자의 신분으로 살게 해줄 테니 나에게 시신을 유기해달라고 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경찰이 CCTV 영상을 확인한 결과 범행 추정 시각을 전후로 피해자 집을 드나든 사람은 정유정이 유일했다.
경찰이 추궁하자 그는 “피해자와 말다툼을 하다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다시 진술을 바꿨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했는데 환경이 여의치 않아 진학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모두 거짓말로 판명됐다.
◇초범인 사이코패스
“살인을 해보고 싶었다.”
여러 증거가 나오고 할아버지도 함께 설득에 나서자 정유정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충동을 느꼈고, 욕구를 없애기 위해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 동안 그는 냉정한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살인 후 CCTV에 나타난 발걸음도 매우 가벼워 보인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은 자신의 유튜브에서 “CCTV 속 정유정이 신나 보이는 이유는 자기가 정말 해보고 싶었던 끔찍한 일을 완성했다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라며 “내가 잡힐까, 어떻게 처벌받을까를 고민하는 일반 범죄자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 시대에 타인과의 공감은 불가능하지.”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특정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두려움, 죄책감, 슬픔, 분노 등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사회적 규범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득에 따라 타인의 권리를 쉽게 무시하고 침범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다. 실제로 정유정은 유치장에 있으면서도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 등 전혀 심리적 동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경찰청이 최근 정유정을 상대로 한 사이코패스 진단 검사(PCL-R)를 한 결과에 따르면, 그의 사이코패스 지수는 28점이었다. 아내, 장모 등 여성 10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은 강호순이 27점으로 정유정보다 낮았다.
사이코패스 진단검사는 ‘병적인 거짓말’ ‘과도한 자존감’ 등의 20개 문항을 전문가가 직접 검사자를 보고 채점해 점수를 매긴다. 총 40점 만점으로, 25점 이상일 때 사이코패스로 간주한다. 일반인은 15점 안팎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검사 과정에서 사이코패스인 것처럼, 또는 아닌 것처럼 속일 수 있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이코패스로 결론 내리기 위해선 진단 검사와 함께 어린 시절이나 과거 행적, 범죄 유무나 정신건강의학과 진단 등의 자료를 근거로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수정 교수는 “사이코패스 검사를 위해서는 과거력을 다 뒤진다”며 “‘어릴 때 문제 행동’ 항목의 경우 생활기록부까지 검토한다”고 설명했다.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인 요소도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모노아민 산화효소(MAO-A)라는 유전자가 부족해 뇌에서 공격성을 억제하는 세로토닌이 적다. 행동을 제어하는 전두엽 기능도 약하다고 한다.
◇은둔형 외톨이
<”선(善)이란 선택하는 거야. 인간이 선택을 못 하면, 곧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거지.”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인간 100명 중 1명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사이코패스라고 모두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정유정은 외톨이었다. 두 살 때 부모님과 헤어졌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학창 시절 친구도 없었다. 고교 동창들은 그를 커튼 뒤에서 간식을 먹던 아이로 기억한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정유정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휴대전화에는 최근 3개월 동안 외부인과 연락한 흔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은둔형 외톨이 생활이 사이코패스 성향을 강화시킨 것으로 분석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 19~34세 청년 중 고립·은둔 청년은 약 53만8000명이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그 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정유정의 경우 긴 고립 기간에 범죄물을 탐닉하면서 자신의 망상을 현실에 접목한 것으로 보인다”며 “상상 속에서 시나리오를 쓰며 1인 다역으로 범죄 연극에 빠져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의뢰인’처럼 시신만 없다면 범죄를 숨길 수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전문가들은 정유정의 범행이 인천 초등생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2017년 3월 당시 17세였던 김모양이 초등 2학년 아이를 유괴 살인한 사건이다. 김양은 학교 부적응으로 중퇴하고 집에서 드라마 ‘한니발’ 등 고어물을 즐겨 봤다. 인터넷 캐릭터 커뮤니티에서 만난 박모(당시 19세)양과 시체 해부 등에 대해 이야기하다 살인을 저질렀다. 오 교수는 “두 사람 다 무언가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범죄 관련 도서와 드라마를 보며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다, 이것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정유정은 세상을 향해 벽을 쳤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동안 살인을 꿈꾸는 괴물로 성장했다. 그래도 그가 왜 죽였는지 모르겠다고? 영화 ‘화차’에서 형사 김종근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 죽이는 인간들을 네가 몰라서 그래.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종자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