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하담의 '모현정' 아래로 흐르는 남한강 물길. 다산은 유배형을 받고 장기(포항)로 가는 길에 지금의 모현정 부근에 있던 부모 묘소에 참배하고 하직 인사를 시 '하담별'로 대신했다. / 조혜원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1801년(순조 1년)은 다산에게 혹독한 해였다. 정조 승하 후 고향집 마현(마재마을, 남양주시 능내리)으로 돌아온 다산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노론의 모함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1월 28일 한양으로 가 머문다. 예상대로 2월 7일 조정에서 탄핵 논의가 일어나고, 이튿날 새벽에 다산은 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2월 28일 경상도 장기현, 지금의 경북 포항으로 유배 갔다가 7개월 여 만에 천주교 신자이자 다산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쓴 백서 사건에 연루되면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된다. 이후 한양에서 800리나 떨어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다. ‘신유옥사’와 ‘신유박해’가 일어난 해 다산의 이야기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다산이오’의 저자이자 다산을 연구하는 문학박사 김형섭 남양주시다산정약용팀장은 “여러 기록과 정황상 다산은 그해 참담한 심경으로 한강을 최소 네 번 건넜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께에서 나고 자란 다산에게 물길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문이었다. 그중 ‘습수(濕水)’라 부른 남한강은 기나 긴 유배길에 오르며 이별의 회한을 시로 풀어낸 물길이자 해배(귀양에서 돌아옴)돼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먼저 마중 나온 물길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고향인 마재마을 앞을 흐르던 한강 ‘열수’, 다산이 버킷리스트를 실현한 북한강 ‘산수’에 이어 다산의 본향 남양주시와 함께하는 ‘다산 발자취 기행’ 세 번째 이야기는 ‘습수, 남한강 따라간 이별 여행’이다.

◇유배길에 남긴 4편의 이별 시

장기로 생애 첫 유배길에 오르게 된 다산은 세 번 이별하고 세 편의 이별 시를 남긴다. 남대문 밖 3리 떨어진 ‘석우’에서 큰형 정약현을 포함한 친지들과의 이별을 담은 ‘석우별’, ‘사평’(서울 송파구)에서 부인과 어린 자식들을 잠깐 만난 뒤 기약 없는 이별을 노래한 ‘사평별’, 충주 하담에서 부모의 묘소에 올라 구슬픈 작별 인사를 올린 ‘하담별’까지 이른바 ‘삼별시’다. 김형섭 팀장은 “훗날 다시 강진 유배길에 오를 때 나주 밤나무 아래 정자 ‘율정’에서 형 정약전과 서로 다른 유배지로 갈라지는 슬픔을 풀어낸 ‘율정별’까지, 네 편의 이별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지만, 시를 통해 다산의 유배 노정을 이해해볼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양에서 출발한 다산은 석우, 사평, 광주, 죽산, 충주, 연풍을 거쳐 문경새재(조령)를 넘는다. 김 팀장은 “다산이 거친 사평과 하담, 탄금대 등은 남한강 줄기 중요 나루터가 있는 곳이고 옥고를 치르고 나와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죽산(안성 죽산면)과 가흥(충주 중앙탑면)에서 유숙(남의 집에서 묵음)했다’는 기록(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으로 보아 물줄기를 따라갔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장기 유배지까지 도착 기한은 열흘이 채 되지 않는 9.5일. 다산은 편치않은 몸으로 한양 출발 9일 만에 유배지에 도착했다.

◇시 ‘하담별’ 남긴 충주 하담

한양에서 포항 장기로 유배를 떠나온 지 5일째 되는 날, 다산은 충주 하담에 있는 선영에 들러 부모의 묘를 참배한다. 18년 전에는 진사에 합격해 기쁨을 알린 곳에서 유배길 하직 인사를 시 ‘하담별’로 대신한다.

“이 아들 낳고 부모님 기뻐하시며 쉴 새 없이 보듬어주시고 기르셨지요 (중략)/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리도 못 돼버려/ 이 세상 사람들 거의 다/ 아들 낳은 것 축하하지 않게 만들 줄을….”

다산의 부모 정재원과 윤소온의 묘는 남한강 수계 부근인 충주목 가차산면(현 금가면) 하담진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소나루’로도 불린 하담진은 지금의 ‘하강서원’ 부근이다. 하담은 ‘장호원에 당도하여’라는 시에서 “충주 점점 가까워지니 고향과 흡사하네”라고 표현할 정도로 다산에게 제2의 고향으로 느껴질 만큼 특별했던 곳. 여덟 살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이곳에 안장 후 고향인 소내(苕川)에서 300리 물길을 가르며 자주 찾았던 안식처였다.

다산의 시 속 충주 하담의 '사휴정'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모현정'은 남한강 전망대다. / 조혜원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일대에 있던 다산의 부모, 조부모, 형 정약전 부부의 묘소는 1981년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이장해 현재 별다른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풀만 무성하다. 서원 뒤편 소나무가 우거진 계단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아담한 정자 ‘모현정(慕賢亭)’이 자리한다. 다산의 시 ‘귀전시초’와 저서 ‘아방강역고’ 등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사휴정(四休亭)’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사휴정은 남아 있지 않지만, 모현정 주변은 묘소 터를 포함해 충주 내 다산유적지로 알려지며 알음알음 걸음하는 이들이 많다.

조선의 문신 홍이상의 후손들과 지방 유림이 1817년에 세웠다는 모현정에 서면 정자 앞으로 시야를 가로막는 높은 산 하나 없이 탁 트인 전망에 눈이 시원해진다. 멀리 남한강 수위를 조절하는 ‘조정지댐’, 기차가 지나는 철교도 양옆으로 보인다. 그 옛날 목계나루를 오가는 나룻배 풍경을 감상하기에 최적이었을 위치. 모현정은 석양 무렵에 더욱 절경을 뽐낸다. 이곳에서 내려와 서원 옆 오솔길을 따라가면 강가에 닿기 전 별안간 거대한 바위 군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물가 가까이, 바위에 기대 하염없이 ‘물멍’ 하기 좋은 자리다.

◇신립 장군 소환한 ‘탄금대’에 올라

다산의 유배길 여정에 따르면 하담 묘소 참배를 마치고 얼마 가지 않아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두물머리(합수머리) 부근 ‘탄금대’를 지난다. 충주 시민의 휴식처로 자리 잡은 탄금대는 해발 108m 야트막한 ‘대문산(태문산)’의 또 다른 이름. 가야국 우륵이 이곳에 와서 가야금을 탔다 해서 탄금대로 불렸다는 얘기는 유명하지만, 다산 역시 “나의 탄금대”라고 표현할 정도로 좋아했던 곳이다.

신립 장군이 임진왜란 때 적과 맞서 싸우며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탄금대의 '열두대'로 내려가는 길 소나무 사이로 남한강이 보인다. 다산은 탄금대를 보고 신립의 전술을 비판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 조혜원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다산은 시 ‘탄금대를 지나며’를 통해 탄금대 ‘열두대’ 절벽 부근에서 투신 자결한 “신립 장군을 일으켜 얘기나 좀 해봤으면” 한다. 신립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탄금대 부근에서 적군과 대결하다가 참패를 당하고 강물에 투신한 인물. 다산은 시에서 목숨 바쳐 싸우다 죽은 8000군을 애도하며 수장 신립을 향해 “조나라였으면서 한나라 전술을 따라 해 대패했다”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다산의 비판이 무색하게 탄금대 유적지엔 끝까지 왜군과 맞서 싸운 ‘충장공 신립 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충혼탑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져있다. 신립 장군이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절벽에 있는 바위를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열두대는 남한강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다. 신립 장군의 전술에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열두대 아래 강은 그저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다.

◇'막희나루’를 찾아서

하담 모현정과 탄금대 사이 ‘목계나루’ 부근에 남아 전해지는 ‘막흐레기’라는 지명은 다산이 ‘막희나루[莫喜樂灘]’라 명명한 곳. 김 팀장은 “‘여울이 심해 물이 막 흐른다’는 뜻으로 마을 주민들이 ‘막흐레기’라 부른 곳을 다산은 최대한 음차해 ‘막희’나루라고 했다”며 “이는 ‘목계’나루보다 마을 이름에 가까운 음으로 훗날 다산이 지명에 우리말을 살려 쓰려 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목계나루는 1972년 대홍수로 천년나루와 마을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근처 ‘목계나루 강배체험관’에 가면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와 한강 뱃길의 안녕을 빌던 것에서 유래한 ‘목계별신제’, ‘귀줄다리기’ 등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체험관엔 목계나루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 등이 전시돼 있는데 다산의 시 ‘귀전시초’ 중 목계나루 풍경을 읊은 구절에서도 ‘막희’라는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의 해설을 맡고 있는 홍문희(75) 충주시문화관광해설사는 막희를 가리키는 막흐레기 마을에 대해 “물은 야트막하지만 물살이 세서 ‘막흐레기’ ‘마흐레기’라 부르기도 했다”면서 “이쯤의 여물에서 배들이 지나지 못하면 ‘끌패’들이 배를 끌어넘겨주는 것에서 ‘귀줄다리기’가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했다.

옛날 목계나루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는 '목계나루 강배체험관'. 다산이 '막희'라 불렀던 '목계'의 나루는 1972년 대홍수로 유실돼 터만 남아 있다. / 조혜원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목계나루 강배체험관에서 나오면 목계나루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아직은 뜨거운 햇볕 아래 옛 나루터 쪽으로 걷다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 앞에 걸음이 멈춘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익숙한 싯구가 입안에 맴돈다.

인근 석도산 아래엔 임진왜란 때 두사충이 명당 자리로 알고 춤을 췄다는 습지 ‘두무소’도 있으니 간 김에 들러볼 만하다. 단, 남한강 수위에 따라 두무소의 수심 등 현장 풍경은 달라질 수 있다.

◇해배 후 다시 찾은 남한강

다산은 해배 후에도 부모의 묘를 돌보기 위해 충주 하담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았다. 경유지였던 곳들과 남한강 유역의 풍경, 감회도 다수의 시로 전한다. 특히 해배 후 고향 주변, 남한강 일대의 기행을 기록한 시 ‘귀전시초’에는 다양한 지명이 등장한다. 다산이 즐겨 찾던 양평 ‘용문사’는 물론이고 여주에 이르러서는 ‘구미포’와 ‘파사성’ ‘신륵사’ 등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구미포는 지금의 여주 ‘이포보’ 부근이다. 가까이 있는 파사성에 대해 “당시에 가장 강대한 웅진이었는데/ 왜적들이 돌아가 버린 이후로는 다시 엄공을 기억하는 이 없구려”란 무상함을 노래하기도 한다.

양평 '용문사'는 '다산의 정원'이라 불렸던 남양주 수종사와 함께 다산의 또 다른 '상심낙사(마음 속 즐거운 일)'가 있는 곳이다. 해배 후 남한강 기행을 할 때 용문사가 자리한 용문산도 지나치지 않는다. 오후 느지막하게 용문사에 닿으면 법고와 범종 소리로 물드는 고즈넉한 산사와 조우할 수 있다. / 조혜원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충주 하담 부모 묘소에 오갈 때 거쳐갔던 여주 남한강 변 '파사성'<사진>과 '신륵사'도 시로 남겼다. 여주 남한강에 이르면 지루할 틈 없이 아름다운 풍광이 이어진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해발 230여m 파사산 정상에 신라 때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여주파사성’은 다산의 세월보다 더 긴 시간이 흐른 지금, 여주를 관통하는 남한강의 곡선을 감상하기 좋은 전망대로 유명해졌다. 다산이 파사성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갯가 풍경을 두고 ‘과어가’에서 “파사성 아래는 모두가 어촌인데 (중략) 물가에 풀과 꽃이 매우 예뻐서/ 장대 하나 넓이의 물을 아침저녁 건넌다오”라 한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남한강 여행에서 지나칠 수 없는 명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산이 노닐던 한강 일대 주변 명승지를 그린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1796-97) 속 여주읍내 풍경. / 국립중앙박물관.

김형섭 팀장은 “해배 후 다시 되짚어 간 남한강은 이별시를 남겼던 유배길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과 정서로 다가왔을 것”이라며 “마치 생(生)과 다시 재회한 사람처럼 ‘귀전시초’에는 지나치며 본 파사성이나 신륵사도 자신만의 애정 어린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해 놓았다”고 말했다. 다산의 남한강 기행은 몇 년 뒤 이어진 북한강 기행까지 아우르며 인문 역사지리서 ‘아방강역고’에 ‘한강 물길’의 방점을 찍는 이정표가 된다.

[ 유배 가며 쓴 다산의 ‘이별 시’ 영상으로 만나볼까? ]

남양주 실학박물관의 '동백꽃은 지고 봄은 오고' 전에선 다산의 이별 시가 영상으로 흐른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쓸쓸한 석우마을/ 가야 할 길 세 갈래/ 두 마리 말은 히힝대며 서로 장난하니/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보네/ (중략)/ 삼촌들께서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큰형님은 눈물이 턱에 고인다// 젊은이들은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 노인들 일이야 누가 알 것인가/ 잠깐만 더 조금만 하다가/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울었네.…”

‘1801년 2월 28일 다산은 기약 없는 생이별길에 오른다. 석우(남대문에서 3리쯤 떨어진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던 큰형과 나이 지긋한 숙부들을 보며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한다. 겨우 뒤로 하고 나니 사평(송파)에선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린다. 다산은 “표정이야 비록 씩씩한 체해도/ 속마음이 나라고 다를 수 있으랴” 하며 남편, 아버지로서 약한 모습을 안 보이려는 속내를 시로 털어낸다. 죽산(안성)과 가흥(충주)을 거쳐 3월 2일 하담(충주) 부모의 묘소 앞에 선 다산은 서러움이 폭발한다. 시와 함께 발 아래 전시실 바닥엔 다산이 거쳤던 유배길의 ‘이별 코스’들이 영상으로 그려진다.

남양주시 ‘정약용유적지’ 내 실학박물관 ‘동백꽃은 지고 봄은 오고’전이 열리는 기획전시실. 다산의 유배길 인트로 영상에 머리 희끗한 장년의 관람객이 고개를 끄덕끄덕, 강진 유배길에서 나주 ‘율정’(칠전마을)에서 형 정약전과 이별하는 대목에선 감정이입이 됐는지 혀도 “쯧쯧” 찬다. ‘유배지에서 쓴 정약용의 시와 편지’란 부제를 단 이 전시에선 기약 없는 이별 앞에 유배지로 향하는 남편이자 아버지, 형제, 자식이던 다산의 인간적 슬픔과 마주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보고 나면 유배지에서 남긴 편지와 대표 저서들이 기다린다. 다산이 강진 유배 시절 지인인 윤시유와 함께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강진만 일대 해역지도’, 다조·정석·약천·연지석가산 등 강진 ‘다산초당’의 ‘다산사경첩’ 관련 전시물과 이에 대해 읊은 시도 만나볼 수 있다.

정성희 실학박물관장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들의 서막인 이별 시들은 다산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으며 슬픔을 글로 써 극복할 것이라는 역설”이라며 “다산은 생이별뿐 아니라 훗날 큰형,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은 후에도 이를 증명하듯 그 끝엔 글과 저서를 남겼다”고 했다. 전시는 9월 10일까지, 무료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