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유엔기념공원의 전몰장병 묘역 /박돈규 기자

11월 11일은 다세대주택 같다. 날짜는 하나인데 부르는 명칭, 문패는 여럿이다. 빼빼로 데이부터 떠오를 것이다. 특정한 날 특정한 상품을 소비하라고 부추기는 ‘데이 마케팅’의 히트작. 빼빼로 연매출의 절반이 이날을 전후해 발생할 정도다. 3월 3일 삼겹살 데이, 4월 14일 짜장 데이, 5월 3일 오삼 데이, 6월 4일 육포 데이는 명함도 못 내민다.

11월 11일은 또 농업인의 날이다. 가래떡 데이로도 불린다. 그런가 하면 지체장애인의 날이자 보행자의 날, 해군 창설 기념일이자 레일 데이(코레일)다. 최동원상(등번호 11번) 수여일이기도 하다. 몇 년 전 빗자루들만 모아 전시회를 연 변동해씨는 “문 앞에 걸어두면 마음도 가지런해진다”며 11월 11일을 빗자루 데이로 명명했다.

올해는 정전 70주년. 11월 11일은 유엔참전용사 국제 추모의 날이다. 캐나다 출신 6·25 참전용사의 제안으로 2007년부터 해마다 이날 오전 11시에 1분 동안 세계에서 부산을 바라보며 묵념을 한다. 지구에 하나뿐인 유엔기념공원이 이 항구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그 행사는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으로 불린다.

지난 주말 유엔기념공원에 들렀다. 11개국 2300여 명이 안장된 그 묘지 풍경이 참배객을 압도했다. 6·25에 참전한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튀르키예, 영국, 미국 등의 유엔군 전몰장병들이 오와 열을 맞춘 채 잠들어 있었다. 6·25에서 생환한 유엔군 장병들 중 훗날 전우 옆에 묻히기를 희망한 용사들을 위해 조성된 묘역도 보였다.

해설자는 이렇게 말했다.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여기에 오면 다들 감격합니다. 폐허가 된 그 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것을 보고 그때의 헌신과 희생에 큰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전우 곁에 잠들고 싶다’는 분들이 올 수 있도록 2015년에 안장 규정을 바꿨습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참배객들 틈에서 마음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정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검은 돌에 ‘정숙’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다. 그 아래 영어로 ‘Your respectful silence is required’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요구가 없더라도 침묵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장소였다. 사진 속 참전용사들은 모두 푸르른 청춘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오늘의 평화와 자유는 그들이 목숨을 바치며 바라던 내일이었다. 11월 11일은 유엔참전용사 국제 추모의 날이다.

보훈부, 11월 11일 오전 11시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유엔 참전용사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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