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원형의 오래된 갈색 건물. 유리로 된 출입문 등이 주변 건물들과 사뭇 다릅니다. 1988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목욕탕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3월 운영을 마치고 레스토랑으로 변신했습니다. 목욕 바구니가 쌓여 있던 공간은 손님을 맞이하는 카운터로, 여탕은 주방과 식당 홀로 바뀌었습니다. 여자 미용실은 직원들 휴게실로, 마사지실은 셰프 사무실로 만들었습니다. 5개 방의 벽은 타일로 돼 있어, 과거 목욕탕의 모습이 떠오르게 합니다. 오래된 건물에 있던 중정(中庭)은 그대로 살려 캠프파이어 느낌이 나도록 꾸몄습니다. 이곳은 ‘이목 스모크 다이닝’입니다.
이 이름이 낯선 분들도 계실 겁니다. 혹시 그러면 ‘유용욱 바베큐 연구소’는 어떠신가요?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던 그 작은 공간요. 제가 그를 처음 만난 건 2020년 12월이었습니다. 대기업을 다니며 취미로 했던 바비큐를 업(業)으로 삼고 처음 낸 매장이었지요. 100년 된 상가 안, 테이블은 겨우 하나. 그가 직접 연구하고 개발한 메뉴들을 하나씩 맛보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후 그는 TV, 유튜브 등에 연예인과 함께 출연하는 스타 셰프가 됐습니다. ‘유용욱’이라는 이름은 ‘한국식 바비큐’와 동일시됐습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왜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간판에서 ‘유용욱’을 뺐나요?”
“간판에 ‘유용욱’이 있으니 매장에 제가 잠깐이라도 없으면 손님들이 서운해하시더라고요. 제가 처음부터 다 하려고 하니 테이블을 늘릴 수도 없고요. 매장 규모도 늘리고, 메뉴도 다양하게 바꾸면서 ‘유용욱’과 ‘바비큐’를 빼고, 제 고향인 ‘이목(동)’을 넣었습니다.”
답변이 너무 단순해 신선했습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고든램지 스트리트 피자’에는 고든램지가 없습니다. 있을 거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죠.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냥 ‘브랜드’입니다. 유용욱 역시 브랜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무거웠나 봅니다. “내 이름을 달고 있을 땐 내가 한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스타 셰프 매장에서 셰프를 못 만났을 때 손님들이 느끼는 서운함을 눈치챈 것 같아 미소가 나왔습니다.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파비아’
“과거로 돌아간다면 할아버지 이름으로 와인 이름을 짓진 않을 거예요.”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애니가 말했습니다. 코네티컷의 작은 농장에서 자란 그는 프랑스 유학을 통해 와인에 대한 열정이 커졌고, 현재 미국 나파 밸리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의 남편인 ‘앤디 에릭슨’은 나파 밸리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만났습니다. 2003년 두 사람이 함께 시작한 ‘파비아 와인’은 첫 빈티지부터 로버트 파커 점수 95점을 단번에 획득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스타 와인 부부’가 됐습니다.
이 부부의 와인은 기존 나파 밸리 와인과는 사뭇 다릅니다. ‘카보네 샤도네이’는 버터맛과 오크향이 진하지 않고 상큼합니다. 밝고 신선한 산미는 인공적인 요소를 넣기 전 전통 나파 스타일이라고 합니다.(레트로 유행인지, 최신 나파 트렌드이기도 하다네요.) ‘쿰스빌 카베르네 쇼비뇽’도 견고한 구조 속에서 탄닌과 과실의 맛이 깨끗합니다. 포도 수확을 일찍해 과숙되는 것을 방지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와인 맛처럼 와인병 라벨도 깔끔합니다. 흰색 배경에 ‘파비아(favia)’라는 글자만 적혀 있습니다. 종이는 다른 와인 라벨보다 도톰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고급 종이입니다. 애니의 아버지는 제지업계에 종사했습니다. 덕분에 집 지하실에는 3t에 달하는 큰 레터 프레스가 있었고, 이를 이용해서 크리스마스 카드나 생일 카드를 직접 만들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추억을 바탕으로 애니는 파비아 와인 레이블을 만들때 종이를 눌러 표현했습니다. 와인을 마실 때는 시각, 미각, 후각 등을 모두 사용하지만 손으로 느끼는 촉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검은색으로 적힌 이름 ‘파비아’는 애니 증조 할아버지 이름. 원래는 두 부부의 이름을 따 ‘파비아 – 에릭슨’으로 하려고 했지만, 디자인적으로 멋지지 않아 ‘파비아’라고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나, 애니는 그 이름이 주는 무게를 알게 됐다고 하네요.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부모님, 조부모의 이름은 더욱 그렇습니다. 나 때문에 부모님이 욕 먹는 일은 없어야 하니깐요. 배우 조진웅의 본명은 조원준, ‘조진웅’이라는 예명은 그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았다고 하네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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