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르노를 출항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눈이 시리게 푸른 바다 저 멀리 작은 섬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랑·초록·보라·하늘색으로 칠한 집들이 점점이 박힌 전형적인 지중해 섬. 정말 믿기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섬이 교도소라니. 그리고 섬에 수감된 재소자들이 포도를 키워 와인을 빚는다니.

토스카나 고르고나 섬. 유럽에 마지막 남은 교도소 섬이다./김성윤 기자

이탈리아 토스카나 서쪽 바다에 있는 이 섬의 이름은 고르고나(Gorgona). 나폴레옹이 유배된 엘바(Elba),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등장하는 보물섬 몬테크리스토(Montecristo)와 함께 토스카나 제도(諸島)를 이루는 일곱 섬 중 하나다. 유럽에 마지막 남은 교도소 섬이기도 하다. 섬 전체가 거대한 교도소다.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이 섬에는 15년 형 이상을 선고받은 중범죄자 81명이 수감돼 있다. 다른 교도소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한 죄수 중에서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이들만 고르고나에서 남은 형기 3~4년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간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포도밭에서 수감자 셋이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죄수복을 입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섬 주민처럼 보였다. 이들은 밤에는 수감동을 벗어날 수 없지만, 낮에는 밖으로 나와 주어진 작업을 한다. 농사짓고, 빵 굽고, 건물 수리하고, 페인트를 칠하는 등 주로 자급자족에 필요한 일들이다. 섬에서 만난 이탈리아 법무부 교정국 관계자는 “수감자들이 사회로 복귀했을 때 밥벌이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르고나 섬 교도소 재소자가 포도밭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김성윤 기자

이탈리아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와인도 만든다. 1999년부터 섬 구릉을 따라 포도밭 2.5헥타르(약 7500평)를 조성해 와인 생산을 시도했다. 경험 없는 수감자들이 와인을 제대로 빚을 리 없었다. 교정국은 여러 와인 업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모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지만, 피렌체 프레스코발디(Frescobaldi) 한 곳이 화답했다.

프레스코발디는 1308년부터 700년 넘게 와인을 생산해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기업 중 하나다. 람베르토 프레스코발디 회장은 “30대에 걸쳐 와인을 생산해온 우리 가문은 사회에 기여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해 왔다”고 했다. “모든 직원이 반대했습니다. 아내도 만류했죠. 하지만 수감자들이 와인 제조 경험을 쌓는다면 출소 후 와인 업계에서 일하는 등 재활에도 의미 있는 제안이기에 수락했습니다.”

람베르토 프레스코발디 회장./프레스코발디

베르멘티노, 안소니카, 산조베제, 베르멘티노 네로 등 토스카나 토착 품종 포도를 토종 효모로 발효한 유기농 와인이다. 연 생산량은 9000병. 2012년부터 프레스코발디에서 파견한 포도 재배, 와인 양조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와인 품질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프레스코발디 회장은 “많은 소비자가 이 와인을 교도소 수감자들이 만들었다는 스토리를 모른 채 오로지 맛으로 구매할 정도”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지난 6월 6일은 2023년산 고르고나 와인을 출시하는 날이었다. 프레스코발디는 이탈리아 교정국 특별 허가를 받아 세계 각국 언론을 섬으로 초대해 와인 생산 현장을 공개하고 와인 시음 행사를 열었다.

2023년산 고르고나 화이트와인./프레스코발디

고르고나 와인은 신기하게도 짭짤한 맛이 났다. 파인애플, 배 향에서 설탕에 절인 레몬 같은 감귤 향으로 발전하는 신선하고 강렬한 풍미를 짠맛이 받쳐줬다. 안주 없이 와인만 마셔도 맛이 있었다. 프레스코발디 관계자는 “포도밭이 바다 바로 옆이라 포도나무가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을 연중 내내 맞는다”며 “성분 분석 조사를 해보면 토스카나 다른 지역에서 같은 품종으로 생산한 와인보다 염도가 2배 이상 높다”고 했다.

포도밭에서 가지치기를 하던 재소자 다니엘레는 “출소 후 장기 목표는 와인 업계에서 일하는 것이고, 단기 목표는 섬을 나가자마자 내가 만든 와인을 맛보는 것”이라며 웃었다. 재소자들은 알코올 섭취가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고르고나 와인의 평균 소매가는 이탈리아 기준 110유로 (약 165000원)로, 국내에는 현재 유통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