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한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와 제목을 비슷하게 달았지만 사실 나는 적이 아닌 동업자와 같이 자는 처지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야겠다. 결혼할 나이가 한참 지난 40대 중반이었다. 서울 강남 가로수길의 단골 바에서 보드카 두 잔을 얻어먹었던 여성에게서 한 달 반 만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거두절미하고 “고노와타에 소주 한 잔 하실래요?”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고 있던 나는 문자를 받자마자 눈썹을 휘날리며 일식집으로 달려가 ‘고노와가 뭔지 몰라서 나왔는데, 해삼 내장의 일본어였군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내가 전에 연재했던 ‘음주 일기’라는 글을 읽고 다른 건 몰라도 마음씨는 따뜻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요컨대 사귀자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혼을 한 번 했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덧붙였다. 기가 질린 나는 이렇게 들이댈 생각이었는데 내가 문자를 씹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느냐고 물었다. 만약 그랬다간 평생 연락을 끊었을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부터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1년 뒤 동거인의 신분으로 서로를 탈바꿈시켰다가 2년 뒤엔 결국 부부가 되었다. 출판 기획자인 아내는 기획서를 내밀며 남편에게 “어서 책을 쓰라”고 졸랐고 남편은 “부인, 목구멍이 폴리스 에이전시(포도청)라서 당분간 그럴 수 없소”라며 광고 회사를 계속 다녔다. 아내가 꿈꾼 책 출판은 물 건너가는 듯했다. 광고 회사는 대행사든 프로덕션이든 직원들이 자는 걸 매우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급한 일이 터지면 사흘씩 집에 못 들어가기도 했다(실제로 회사 근처 살던 아트 디렉터 차장님 한 분이 담배 사러 나와 잠깐 들렀다가 붙잡혀서 이틀간 집에 못 들어간 걸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런데 광고주 중에 급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자발적 노예 생활을 즐기는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힘이 쪽 빠져서 다른 글을 쓸 엄두를 못 냈다. 2019년, 이틀 밤을 새우고 사흘째 되는 날 새벽 회의를 마친 나는 드디어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냈다. 다행히 책이 잘 팔리는 바람에 아내는 출판 기획자로서 체면을 살렸고 그녀의 ‘기획 상품’이었던 나도 계속 글을 쓰거나 글쓰기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와 출판 기획자 커플이다 보니 부부가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경우도 많다. 책을 내고 싶은 사람들을 모집해 원고를 쓸 수 있게 도와주는 ‘책 쓰기 워크숍’에서 아내는 기획 파트 강의를 했고 나는 리뷰와 글쓰기 파트를 맡았다. 수강생들은 강의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와서 더블 강의를 하는 걸 좋아했고 사람들은 급기야 우리를 ‘세트’로 보기 시작했다. 출판사 메디치미디어에서 연락이 왔다. 매달 출간되는 자사의 책 한 권을 놓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리뷰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코너 이름으로 ‘부부 리뷰단’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부부 사기단보다는 어감이 좋지 않으냐며 부린 억지였는데 다행히 출판사에서 받아들이는 바람에 즐겁게 연재를 시작했다.
코로나 19 팬데믹의 영향으로 직장이나 직업을 잃는 사람이 많아졌고 사업장 규모도 작아져 부부나 가족이 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내 주변에도 부부가 같은 직종에서 일하거나 아예 동업하는 분이 많다. 정혜신·이명수 선생은 여러 면에서 우리의 롤 모델 같은 분들이고 박연준·장석주 시인이나 김은령·김호 작가도 마냥 부러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직업이나 경력은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의기투합하는 커플도 있다. ‘싸가지 없는 점주로 남으리’를 쓴 박규옥 작가는 남편과 함께 편의점을 운영하는데 ‘부부가 하기엔 이보다 좋은 직장이 없다’고 자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맞교대로 인수인계하느라 20분 정도만 마주치고 나면 하루 종일 안 볼 수 있어서’였다. 함께 돈은 벌지만 싸울 시간이 없어서 최고라는 것. 물론 박규옥·이승모 커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다만 박규옥 작가가 좀 웃기는 사람이라 그렇다. 이와 똑같은 얘기가 켄 리우의 단편 ‘장거리 화물 비행선’에도 나오니 궁금하면 읽어보시기 바란다. 아,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새 죄송하다.
지난주엔 통영 야소골에서 ‘야소주반’이라는 주문형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김은하·박준우 커플을 만났다. 통영의 명소 야소주반은 작가나 음악가, 여행가 등을 초청해 문화 행사를 열곤 하는데 나도 여기서 북 토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김장을 도와주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일하는 중간에 부부가 계속 다투는 것이었다(나는 남편이 아내에게 그렇게 대드는 건 상상도 못 했다). 하긴 동양화를 전공하고 셰프가 된 김은하나 건축가이면서 술을 빚는 박준우나 보통 개성 강한 사람이 아니니 부딪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일하는 부부나 커플이라도 스타일은 모두 다르다는 걸 깨달은 저녁이었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나 말고도 위에 말한 사람들은 모두 동업자와 같이 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