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심모(41)씨는 최근 초등 6학년 딸이 가져온 학원 안내문에 ‘김서윤(가)’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딸에게 물었다. “김서윤(나)도 있어?” 돌아온 대답이 당혹스러웠다. “요즘엔 그렇게 하면 (부모들이?) 싫어하니까 김서윤이 3명이면 김서윤가, 김서윤A, 김서윤1, 이렇게 불러.”
아무렇지 않게 ‘김서윤A’ ‘김서윤B’로 살거나, ‘큰 서윤’ ‘작은 서윤’으로 불리더라도 그러려니 했던 1990년대와는 너무 달라진 것.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우리 반 동명이인을 ‘예쁜 오해영’ ‘그냥 오해영’으로 나눠 불렀다가는 송사를 각오해야 할 판이다. 심씨는 “늘 ‘작은 누구’라고 불렸어도 별 탈 없이 잘 컸는데 요즘은 너무 예민하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귀해도 너무 귀한 요즘 금쪽이들. 아이들 마음 다치지 않게 한다는 명목으로 이것도 금지하고 저것도 피하다 보니 오히려 요지경이 된 교실 풍경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이랑 다른 반으로 배정해주세요”
신학기를 앞둔 2월,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들의 관심은 ‘반 배정’. 유튜버로 활동하는 현직 교사들이 “초등 교사가 알려주는 반배정의 비밀!” “다음 학년에 절대 만나면 안 되는 아이가 있다면?” 같은 영상을 올리고 있다. 가나다순이나 생년월일에 따라 배치하고, 쌍둥이나 학습 부진,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같은 특이 사항을 ‘재배정’하는 절차가 있다는 게 핵심. 이때 가급적 동명이인을 한 반에 두지 않도록 조정을 하기도 한단다.
역으로 교사들은 가장 골머리를 앓는 시즌이다. 초등 교사인 하모(33)씨는 “학생 수가 줄어서 매년 겹치지 않게 섞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서로 다 떨어뜨려 달라고 해 난감하다”며 “‘유치원 때 싸웠다’ ‘그 집 부모가 마음에 안 든다’ 같은 이유를 드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A학생의 요구는 반영이 됐는데, B학생의 요구는 그렇지 않다면 새 학기 시작 전부터 분란의 씨앗을 심게 되는 셈이라고.
◇일기도, 운동회도, 수련회도 안 돼
초등학교 1학년 딸을 키우는 김진영(40)씨는 지난 1년간 초등 생활에 가졌던 많은 기대를 거듭 접어야 했다고 말한다. “1월부터 두 달간 겨울방학을 하고 바로 2학년이 돼요. 그나마 형식적으로 내준 겨울방학 숙제도 검사해 줄 사람이 없는 거죠. 운동회 같은 대회는 아예 없었고, 제 추억이 워낙 좋았던 터라 딸도 걸스카우트를 시키고 싶었는데 그것도 없어졌더라고요.”
서울 서초구에서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정모(43)씨는 ‘일기 쓰기’가 사라져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이들의 사생활 침해, 가정환경이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일기가 금지됐다고. 정씨는 “몇 줄이라도 매일 일기 쓰는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글쓰기 훈련이 되는데, 이유는 그럴싸하지만 교사 편하자고 귀찮은 숙제를 없앤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그렇게 또 사교육(문해력·글쓰기 학원)이 하나 늘었다. 코로나를 거친 뒤 많은 초등학교가 운동회·수련회 같은 야외 활동을 없앴는데 정씨 아들들이 다니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요즘 운동회 풍경은 이렇다. 학년별 소규모의 ‘체육 대회’ 같은 형식으로 바뀌고, 학부모들도 참여할 수 없다. 레크리에이션 업체를 고용해 협동심을 기르는 게임으로 채워지는 경우도 많다. 100m 달리기, 계주처럼 경쟁을 독려하고 순위를 매기는 운동은 뒷전으로 밀렸다고. 지는 팀 아이들이 속상할 수 있으니 무조건 ‘무승부’로 마무리되는 것도 관례. 당연히 1·2·3등 등수 매기기, ‘공책 묶음’ 같은 선물 시상식도 없다.
◇내 아이의 부족함을 알리지 말라
초등학교 전 과정에서는 아이들의 학업 성취를 공식적으로 계량화하지 않는다. 수우미양가 같은 평가 방식은 옛말. ‘사교육 열풍’에 선행 학습이 일반화되고 동네마다 학원 계급이 촘촘히 짜여 있지만 정작 학교 안에서는 ‘점수 매기기’를 금기시하는, 또 다른 어색한 풍경이다.
“1번, 11번, 21번. 칠판 앞에 나와서 문제 풀어보세요.” 학창 시절에 일반적인 수학 시간의 모습이지만, 요즘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친구들 앞에서 문제를 풀지 못해 모욕감을 느꼈다면 아동 학대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경쟁을 부추긴다는 게 이유. 주부 이명진씨는 “건강한 경쟁과 결과에 승복하는 것을 배울 기회가 사라지는 것 같다”며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오히려 박탈감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