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종종 별거한다. 첫 별거는 2019년 11월이었다. 그해 5월 다니던 회사를 과감하고 대책 없이 그만둔 남편을 나는 제주도로 내려 보냈다. 남편은 당시 첫 책을 쓰고 있었는데 좁은 집에서 둘이 같이 있다 보니 좀처럼 원고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나는 마침 제주에 막 집을 다 지은 아는 동생에게 “다른 사람이 들어가기 전에 그 집을 좀 쓰고 싶다”고 부탁했고 그 동생은 흔쾌히 사용을 허락해 주었다.
제주에 짐을 싸 내려가는 남편에게 나는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관광지 돌아다니지 말 것, 친구 불러들이지 말고 원고에 집중할 것, 매일 일기를 쓸 것 등이었다. 나 역시 남편과 같이 일기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남편은 실제로 좋아하는 술도 멀리하고 마치 수도자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첫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원고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우리 둘이 각자 쓴 한 달간의 별거 일기는 단행본으로 묶여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가 되었다. 남편이 세 번째 책을 마무리할 때도 두 달 동안 따로 지내며 원고를 썼다.

가장 최근의 별거는 설 연휴 이후 1주일이었다. 설 연휴를 서울에서 같이 보내고 남편은 고양이 순자와 보령 집으로 갔고 나는 매년 요맘때 하는 포장 아르바이트를 위해 서울에 홀로 남았다. 내가 보령으로 내려가기 전날 남편은 오랜만에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처가의 캘리(공처가의 마음을 손글씨로 쓰는 부부 이야기)’를 적어 올렸다. “아내가 내일 온다. 좋으면서도 살짝 불안한 건 무엇 때문일까”라고. 아마도 보령에 돌아온 내가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잔소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남편이 있는 집으로 가는 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울적했다. ‘아, 이제 가서 또 밥을 차려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부는 같이 사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종종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는 것을 우리 부부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떨어져 지내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서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은 삶에 활력이 된다. 특히 오랫동안 혼자 지내오던 사람이라면 더 필요하다. 자기만의 공간을 누리는 그 시간을 나는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별거의 효용 중 으뜸은 이것을 누리는 일이다. 남편이 없으면 끼니 시간에 맞춰 밥상을 차리지 않고, 종일 게으르게 누워 있어도 “어디 아프냐”는 남편의 걱정을 듣지 않아도 된다. 잠이 안 오면 새벽까지 내가 좋아하는 범죄 수사물을 텔레비전 볼륨 신경 쓰지 않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사소한 자유는 혼자 지내는 남편도 누릴 것이다. 책상도 모자라 방바닥까지 원고 자료를 어지럽게 펼쳐 놓아도 잔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고 순간순간 아내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안할까?
또 다른 별거의 효용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부활을 통해 확인하는 사랑’이다. 둘이 붙어 있으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가끔은 귀찮고 지겹다. 이 감정이 쌓이면 자칫 미움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적절한 별거는 미움의 싹을 애초에 잘라 버린다.
그러니 남편 또는 아내가 혼자 시간을 갖고 싶다면 그냥 그러라고 해보자. 물리적 거리를 통해 감정의 거리를 확인하고, 떨어져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는 것은 안 된다. 경험상 부부 별거의 효용성이 극대화되는 적절한 기간은 보름 남짓이다. 길어지면 계속 혼자 있고 싶어질 수도 있다.
시인 임경섭의 산문집 ‘이월되지 않는 엄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내가 여행을 간 틈을 타 식탁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신다. 아내가 집에 있어도 매번 혼자 마시는 술. 아내가 없는 그 ‘틈’이란 것에 또 맛이 다르다. 사뭇 틈을 생각하게 하는 술이고 술을 생각하게 하는 틈이다. 나는 아무런 커피 잔에 아무렇게나 소주를 따르며 생각한다.”
부부 사이에 틈을 갖자. 어느 틈에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원래 멀었던 부부는 뭐 할 수 없고. /윤혜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