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맘’은 서울 강남의 극성 엄마들을 풍자하는 상징이다. 수백만원짜리 패딩을 입고 명품백을 들고, 고급차를 타고 아이 학원 ‘라이딩’을 하며 ‘제기차기’ 과외 선생님 면접을 본다. 개그우먼 이수지가 내놓은 페이크다큐 속 대치맘의 모습.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이렇게 시작한 아이들이 ‘4세 고시’와 ‘7세 고시’를 거쳐 ‘초등 의대반’에 입성하고 내신·수능 준비를 완벽히 해 의대나 서울대에 진학한다. 이른바 ‘대치 키즈’의 엘리트 코스다.

수백만원짜리 패딩을 입고 명품백을 들고, '제기차기' 과외 선생님 면접을 본다. 개그우먼 이수지가 내놓은 페이크다큐 속 '대치맘'의 모습이 화제다. /유튜브 캡쳐

그런데 최근 대치동에 균열이 감지된다. 자사고인 서울 휘문고와 세화고가 올해 신입생 미달 사태를 맞은 것. 강남 8학군으로 올해 나란히 31명씩 서울대 합격자를 배출(전국 7위)한 전통의 강호다. 세화고는 작년 고3 재학생 중 2025학년도 수능 만점자를 배출했고, 휘문고는 지난해 전국 고교 2380곳 중 전주 상산고에 이어 의대를 두 번째로 많이 보냈다. 입시 컨설턴트들에게는 ‘탈(脫)대치 전략’을 구하는 문의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대치동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휘문고 미달이 쏘아 올린 작은 공

휘문고 미달은 많은 학부모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사했다고 할 정도로 명문고의 상징이던 학교. 오랜 전통은 전통대로, 내로라하는 대입 실적은 실적대로 ‘양수겸장’ 휘문고의 미달 사태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신호다.

오랜 전통과 내로라하는 대입 실적, '양수겸장'의 명문 휘문고. /뉴시스

대치동에서 중2 쌍둥이를 키우는 이모(42)씨는 최근 부동산 앱을 뒤적이며 송파·강동 지역의 아파트를 물색 중이다. 이씨는 “휘문고 미달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며 “우리 애들의 학업 역량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대치에 남아 있는 건 좋지 않은 선택 같다”고 말했다. 상위권 학생들이 몰려 있어 내신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렵기 때문. 소위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이다.

“내신이 깡패.” 최근 입시 경향을 살펴본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작년 말 서울대는 2028학년도부터 정시에도 내신을 40% 반영하기로 했는데, 다른 주요 대학도 이정표 격인 서울대의 ‘내신 강화’ 방침을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이씨는 “중위권 학생들은 강남에서 설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학부모들 사이에 차라리 내신 성적 챙기면서 학업 분위기가 무너지지 않은 ‘준학군지’를 찾아보자는 흐름이 있다”고 했다. 이른바 ‘탈대치’다.

올해 딸이 서초구의 ‘갓반고(학업 성취도가 높은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한 주부 박모(45)씨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아이가 어릴 때 운 좋게 강남 입성에 성공했고 면학 분위기가 있는 이곳이 모범생 같은 아이 성향에도 맞아요. 그런데 입시가 목표라면 우리 애가 내신에서 바닥을 깔아주고 결국 피해자가 될 것 같아 걱정이에요.”

반면 박씨의 ‘절친’은 너무 벌어진 집값 탓에 대치 입성을 포기하고 강북에 남았고, 아들을 강북의 ‘탑티어’ 자사고인 선덕고에 보냈다. 올해 재학생 수능 만점자를 배출한 도봉구의 명문고. 박씨는 “내 딸도 이화여고 같은 강북의 자사고를 보내거나, 위례 같은 곳으로 이사를 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는다”고 했다.

학원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서울 대치동 풍경. /연합뉴스

◇준학군지는 어디인가요?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교육평가연구소장은 “최근 탈대치를 고민하는 학부모들의 상담이 늘었다”며 “대치를 벗어난다고 해도 아주 멀리 가는 건 아니고 송파, 강동 등으로 눈을 돌리는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엑소더스’ 수준은 아니지만, ‘대치 불패 신화’에 금이 갔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각되는 용어가 ‘준학군지’다. 통상 대치·목동 등 학원가와 입시 성적이 좋은 학교들이 몰려 있는 지역을 전통적인 학군지로 꼽고, 그 외의 지역을 비학군지라 부른다. 그런데 그 사이 어딘가를 뜻하는 용어로 준학군지를 찾는 학부모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교육 커뮤니티 등에는 ‘학원이 많고 대단지 아파트들이 있는 동네’ ‘일반고 졸업생 기준으로 절반은 인서울 대학 가는 곳’ 등으로 정의된다. 구체적으로 강동 고덕, 송파 방이, 마포 등이 꼽힌다.

일러스트=김영석

휘문고 미달 사태에서 이런 경향을 읽는 분석도 있다. 내신 경쟁과 높은 학비로 자사고 경쟁률은 대부분 떨어지는 추세지만, 서울 안에서는 미묘한 변화 기류가 보인다는 것. 서울 소재 15개 자사고(하나고 제외)의 일반전형 경쟁률은 이화여고(1.74대1), 선덕고, 중동고, 배재고, 중앙고(1.35대1) 순으로 높았다. 중동고를 제외하면 전부 비강남 지역에 있다. 배재고를 제외한 4곳은 전년보다 경쟁률이 상승했다. 서울 자사고 일반전형 경쟁률은 전년보다 하락했고, 휘문고의 경우 전년도 1.15대1에서 0.67대1로 경쟁률이 뚝 떨어졌다. 자사고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대입 전형 유불리나 진학 성적에 따라 ‘옥석 가리기’가 심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서울 강북에서 중학생 딸을 키우는 심모(41)씨는 “강남·강북 집값 격차가 더 크게 벌어져 ‘여기 살면서 쇼부(승부)를 보겠다’는 집이 많아진 것 같다”며 “주변에서 갈 만한 학교를 찾다 보니 강북 지역 자사고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인기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애매한 지역에, 애매한 장점을 갖고 있는 학교들이 ‘준학군지’로 여겨지면서 관심이 쏠리는 것 같아요. 엄마들끼리는 ‘우리 동네에 입시 성적이 나쁘지 않고 면학 분위기가 괜찮은 학교가 어디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공유합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도 ‘준학군지’의 기준이 아파트 가격과 비슷하게 움직인다고 평가했다. “상대적으로 강북에서 집값이 많이 오른 광진·성동구 등의 초등학교부터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이화여고가 꾸준히 인기인 것은 마포·서대문·은평 지역에 아파트촌이 형성됐기 때문이고요.” 이미 주요 학군별로 거점 고등학교가 있고, 통학의 용이성 때문에 학군 지형 자체가 대회전하기는 어렵다고. 강남 아이가 강북의 학교를 가는 것, 그 반대의 경우 모두 허들이 높다는 것이다. 임 대표는 “부동산 장벽이 너무 높아져 거주 이전의 자유는 학군 이전의 자유와 직결된다”며 “내신 부담에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자사고의 효용에 대한 가치 판단이 정교해진 경향도 있다”고 했다.

◇의대삼천지교? ‘지방 유학’도 현실화

지난달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감행한 이모(41)씨 가족은 이 부동산 장벽을 거꾸로 넘어선 사례. 마포구에 살던 이씨 가족은 올해 아들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경기도로 이사했다. 부동산 자산 가치를 고민하면 내리기 어려운 결정. 온전히 아들 대입에 ‘지역균형전형’이라는 특혜(이씨의 표현이다)를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2028학년도부터는 중학교도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입학·졸업해야 이 전형에 지원할 수 있다. 이에 대입까지 6년간 세 식구가 아예 터전을 옮기기로 한 것. 그렇다고 아들의 학업 성취가 처지는 것도 아니다. 초6이던 지난해 이미 수학은 중3 과정을, 과학은 고1 과정을 선행했다.

이씨는 “입시 상담을 받아보니 ‘지역균형(지균)’ 전형을 타면 쉽게 말해 ‘숙대 갈 실력이면 연고대 간다’고 하더라”면서 “대치동으로 이사 갈지를 고민하다가 지균 전형의 이점을 공략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말했다. “우리 입시 제도가 하루 앞을 모르지만, ‘내신 불패’는 안 변할 것 같아요. 시골에서 온라인 강의로 선행 학습과 수능 준비는 계속 철저히 하면서 내신 따기는 훨씬 쉬운 길을 만들어 주려는 거예요. 대치동 가면 정시고 내신이고 피 터지게 해야 하는데, ‘보험’을 하나 들어두는 셈이죠.”

정부가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의대 정원을 늘리기로 하면서 충청과 강원, 전라도 등에서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한 '지방 유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의대 전문 입시 학원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뉴시스

정부가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의대 정원을 크게 확대하기로 결정한 이후, 충청과 강원, 전라도 등에서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한 ‘지방 유학’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수도권을 제외한 6개 권역에서 충청권만 유일하게 초등학생 유입이 늘어났다는 분석(종로학원)도 나왔다. 충청은 2025학년도 의대 지역 인재 모집 정원이 170명에서 464명으로 전국 최대로 확대됐다.

여러 맘카페에는 “대치동에서 이미 팀 짜서 강원도로 내려갔다더라” “대전·천안이 학군과 인프라가 좋고 서울과 거리도 멀지 않아 적당하다” “연구원·공무원 등 기러기 가족 아이들은 지방으로 전학하는 분위기다” 같은 이야기가 돈다. 입시 유튜버들은 “의대만 공략한다면 ○○지역으로 이사가라”는 식의 ‘지방 유학 가이드’ 콘텐츠를 올리기도 한다. 한 입시 학원 관계자는 “요즘 지방권에 가서 입시 설명회를 열면 대치동보다 사람이 더 몰린다”며 “지방의 우수 학생들이 서울 학군지로 올 유인은 확실히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백년대계라는 교육 정책이 빛의 속도로 급변하면서 ‘전략’과 ‘꼼수’가 판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