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도, 폭설도 오는 봄을 막을 순 없다. 이상기후 속 ‘봄의 전령’인 매화가 설중(雪中), 우중(雨中)에 시나브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는 소식. 이 매화를 시작으로 봄꽃들이 북상할 기세다.
예부터 시인 묵객들 사이에서 탐매(探梅)나 심매(尋梅)는 봄맞이 풍류 중 하나. 봄기운 머금고 피어난 매화를 만나고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매화 성지순례에 나섰다. 3월에 들어서자마자 개화 소식을 알린 경남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부터 전남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 등 명품 매화뿐 아니라 숨은 매화 명소까지, 고매한 아름다움으로 ‘선비의 꽃’이라 불리는 매화를 만나러 남쪽으로 달려갔다. 꽃샘 추위에 매화는 안녕하신지.
◇본격 개화 시작 알린 통도사 ‘자장매’
“올해는 이상기후로 개화율이 떨어진다고 해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며칠 늦긴 했어도 매년 약속을 지키듯 이렇게 피어주어 반갑기만 합니다.”
지난 5일 경남 양산 통도사를 찾은 탐방객들은 추위 속에 핀 매화를 보며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매화 성지 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개화율을 보여 먼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곳이다. 옛 시조 ‘매화사’의 한 구절처럼 ‘눈 기약(期約) 능히 지켜’ 꽃을 피운 통도사 매화는 채도 낮은 풍경에 전각을 배경 삼아 홀로 연분홍 색감의 꽃을 뽐내기 시작했다.
수령 370여 년으로 추정되는 영각 부근의 자장매는 1643년 고승의 영정을 모신 영각이 지어지고 나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장매(慈藏梅)란 이름은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5일 현재 개화율은 약 30%. 통도사 종무소 측은 “요즘 매화 개화 상황을 물어보는 전화가 수도 없이 오는데, 날씨에 따라 피다 질 수도 있고, 어느 날 활짝 필 수도 있으니 통도사 홈페이지에 올리는 사진을 참고해 달라”고 했다.
매화만으로 충분히 설렐 일이지만, 이 천년 고찰엔 볼거리가 풍성하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시고 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대웅전 뒤 금강계단에 안치돼 있다. 산문부터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1.6km 소나무 숲길 ‘무풍한송로’도 운치를 더한다. 2018년에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을 받은 명품 숲길이다. 청류동천을 따라 노송들이 어우러진 길은 지난해 새로 정비해 더 걷기 좋은 길로 변신했다. 숲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다 보면 고즈넉한 경치에 홀려 어느새 매화는 까맣게 잊을지도 모른다.
◇‘사찰 매화 사진 맛집’ 화엄사
전남 구례·장성·순천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명품 매화, 이른바 ‘호남 3매(梅)’가 기다린다. 동선을 잘 짜면 당일치기 ‘호남 매화 로드’에 도전해볼 수 있다. 그중 가장 ‘핫’한 매화는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 올해로 5회째 ‘구례 화엄사 화엄매 홍매화·들매화 프로 사진 및 휴대폰 사진 콘테스트’(이하 화엄매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해오고 있기에 어느 매화 성지보다 관심이 뜨겁다. 성기홍 화엄사홍보기획위원장은 “매화 사진 콘테스트 개최 후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200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린다. 특히 젊은 참가자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작년의 경우 매화가 핀 3월 한 달간 30만명 이상이 화엄사를 찾았다”고 전했다.
3월에 들어서며 사진 콘테스트와 실시간 개화 현황에 대한 문의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고. 사진 촬영을 위한 나무 덱 형태의 ‘포토 라인’도 조성돼 있다. 그곳에 서면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에서 고아한 자태를 뽐내는 홍매화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이학박사이기도 한 성 위원장에 따르면, 해발 450m 지리산 고지에 있는 화엄매는 낮엔 구례 저지대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공기의 영향을 받고, 밤엔 지리산 노고단 산골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꽃을 볼 수 있는 매화이기도 하다. 지난 4일부터 한두 송이 꽃을 피우기 시작해 10일쯤부터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화엄매 사진 콘테스트의 개막식은 3월 22일 오후 1시 30분, 사진 촬영 기간은 3월 10~30일이다. 촬영 기간엔 오전 5시 30분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산문을 개방한다. 용틀임하는 듯 특이한 수형에 꽃이 검붉은 색에 가까워 ‘흑매’라고도 불리는 홍매화는 동 틀 때 역광 사진과 야경 사진을 찍기 위해 찾는 사람이 많다. 수령 450년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천연기념물 ‘들매’(野梅)도 지나칠 수 없다.
들매는 사람이나 동물들이 먹고 버린 씨앗에서 싹이 터 자란 토종 매화로, 꽃이 개량종에 비해선 작지만 척박한 남쪽 경사지에 기대 자라면서도 매년 짙은 향의 백매화를 피워낸다. 화엄매 후계목까지 야무지게 챙겨봤다면 사찰 내 불교 유산 탐방과 함께 섬진강 풍경 감상을 이어가 볼 일이다. ‘사사자삼층석탑’에서 탑돌이를 하다 보면 멀리 섬진강의 물길이 내려다보인다. 화엄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연기암’도 섬진강 전망대다. 다만, 탁 트인 풍경을 보기 위해선 일부 비포장 산길을 오르내려야 하니 참고하자.
◇고목의 가르침, 백양사 ‘고불매’
화엄매를 만난 뒤 장성 내장산 국립공원에 있는 백양사로 이어간다. ‘고불매’가 기다린다. 죽어가는 듯하면서도 매년 봄이면 고매한 꽃을 피워 뭉근한 감동을 주는 매화다. 이곳 원주 스님은 “3월 말쯤 진분홍 꽃을 피우는데 꽃 색깔이 선명하고 향기가 은은하다. 올해도 꽃을 피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며 꽃가지를 매만졌다. ‘우화루’ 옆에서 자라는 고불매는 가지의 일부를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지만, ‘두고 보라는 듯’ 가지마다 촘촘하게 꽃망울을 품고 있다.
고불매의 역사는 1700년경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스님들이 옛 백양사 앞뜰에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가꿔오다 1863년 절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홍매와 백매를 한 그루씩 심었는데, 그중 백매는 죽고 고불매인 홍매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고불매(古佛梅)란 이름은 1947년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古佛叢林)을 결성하면서 얻은 것이다.
고불매를 만나러 오가는 길, 목은 이색이 이름 지었다는 쌍계루(雙溪樓) 앞 징검다리에 서면 백암산과 쌍계루가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백양사에선 고불매 개화 시기에 맞춰 3월 29·30일 이틀간 ‘2025 백양사 고불매 축제 선·매·향(禪·梅·香)’을 연다. 고불매가 주인공인 축제다. 참선 프로그램과 사찰 먹을거리 장터 등이 들어선다. 다시 백양사를 나서는 길, 사찰 초입 노점엔 이맘때만 채취할 수 있는 고로쇠 수액이 등판해 철을 알린다.
◇600여 년 이어지는 ‘선암매’
구례 화엄사에서 백양사까지는 차로 1시간 남짓, 순천 선암사까지는 차로 40여 분 거리다. 선암사의 선암매는 천연기념물인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를 비롯해 아름다운 수형을 자랑하는 매화나무 고목들이 전각 사이, 돌담길을 따라 이어진다. 선암매는 고려 때 중건한 선암사 상량문에 바로 옆의 와룡송과 함께 매화 관련 기록이 남아 역사적 가치를 알린다.
5일 현재 선암매도 개화가 더딘 상황. 선암사 종무소 관계자는 “날씨가 변수지만, 이대로라면 20일 이후에나 볼 만할 것 같다”고 했다. 꽃망울을 터뜨리기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아쉬움을 달래주듯 연못의 개구리들이 우렁찬 울음소리로 봄을 깨운다. 매화와 함께 우리나라 사찰 수각 중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달마전 수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원통전 꽃 문살(꽃살문) 등 선암사 곳곳엔 눈에 담아둘 만한 따스한 풍경이 가득하니 보물찾기를 해볼 것. 화엄매, 고불매, 선암매 외 호남 5매로 꼽히는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 광주 전남대의 ‘대명매’까지 발걸음한 김에 둘러볼 만하다.
◇광양매화축제도, 율곡매도 ‘눈치 게임’ 필수
매화가 일찍 펴 매년 2월 말쯤 첫 매화 축제를 열어온 순천 매곡동 탐매마을은 더딘 개화로 미룬 축제를 8일에 연다. 마을 중심의 소규모 축제지만, 매화 모양으로 꾸민 벽화, 포토존 등 소박한 정취의 탐매마을을 탐방하며 동네 어귀에 자리한 매화를 만날 수 있다.
섬진강 변 흐드러지게 핀 매화 군락을 보기 위해 매년 100만명이 다녀가는 광양매화축제는 16일까지 열린다. 주무대인 ‘청매실농원’의 농장주 홍쌍리 여사는 “지금(5일 기준) 우짜다가 매화가 하나씩 꽃망울을 터뜨리는데, 꽃이 더디게 펴 많이 애가 탄다”며 “예쁜 꽃을 보려면 좀 천천히 와도 되지 않겠나”라고 했다.
낙동강 매화 명소 경남 양산 원동면 ‘순매원’은 이달 초 매화 개화율이 저조해 ‘꽃 없는 축제’로 막을 내렸다. 호남 3매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강원도 강릉 율곡매도 3월 중순 지나 말쯤 돼야 만개한 풍경을 볼 수 있을 듯하다고. 추위가 늦게까지 이어지고 여름이 빨리 온다는 올봄에 꽃놀이 가려면 날씨와 ‘눈치 게임’은 필수다.
[ 매화만 보나요? 미나리 삼겹살, 딸기도 잡숴 봐! ]
3월에 가볼 만한 3色 축제
겨우내 무뎌진 감각을 깨울 시기, 오감을 자극하는 축제는 어떨까. 전국구 매화 명소인 ‘순매원’과 가까이 있는 경남 양산 원동면 ‘미나리타운’에선 21일까지 ‘원동 미나리 축제’를 연다. 일대 미나리 농장에서 미나리 수확 시기에 맞춰 개별로 진행해오던 미나리 축제를 개선해 새로 조성한 ‘미나리타운’에서 진행한다. 큰 규모의 축제는 아니어도 양산과 가까운 부산 등지에서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축제 기간 현장에선 삼겹살과 아삭아삭한 ‘원동 미나리’를 곁들인 ‘미나리 삼겹살’을 즐길 수 있다. ‘바가지요금’ 논란을 없애기 위해 축제장에선 정가제를 실시해 삼겹살은 150g에 1만원, 미나리는 500g에 7000원에 판매한다. 농산물 직거래 장터와 공예 소품점 등도 들어서 구경하는 재미를 더한다.
매화 축제만 찾으면 섭섭하다. 3월엔 굵직한 산수유 축제도 있다. 전남 구례의 ‘구례 산수유꽃축제’는 15일부터 23일까지, 경기도 이천의 ‘이천백사 산수유꽃축제’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구례 산동면 ‘지리산온천관광지’ 일대에서 개최하는 ‘구례 산수유꽃축제’는 15일 유명 가수들의 개막 공연을 시작으로 2.5km 코스의 산수유꽃길 걷기, 산수유 열매 까기 대회, 산수유차 무료 시음회 등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단물 터지는 딸기를 실컷 맛볼 수 있는 논산 딸기 축제는 27일부터 30일까지 ‘논산 시민가족공원’ 일대에서 펼쳐진다. 거리 행진과 퍼포먼스 등 볼거리와 딸기 뷔페, 딸기 디저트 카페 등을 마련해 제철 딸기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3~4월 중 열리는 지방자치단체 축제는 97건에 이른다. 봄 축제의 막이 올랐다. 봄꽃, 봄맛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