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2월의 제주에서 맡았던 귤 냄새를 잊지 못한다. 절벽이거나 폭포였던 명승지를 찾다가 잘못 든 길에서였다. 산도 아니고 숲도 아닌 숲과 밭이 섞인 곳으로, 무슨 마법 지대 같았다.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다 말다 했는데, 바다와 하늘의 색이 구별이 안 돼 온통 하늘인 느낌이었고… 찬란한 광선이 풍경을 온화하게 만들다 못해 휘발시키고 있어서 더 그랬다. 그렇게 색이 연해지고 형체가 흐물흐물해졌으나 귤나무는 선명했다. 귤나무에 매달린 오렌지색 과실은 하도 커서 오렌지가 아닌가 싶었고.

그 귤밭을 생각하다가 오렌지 주스를 가득 싣고 대항해를 떠났던 영국 함선 이야기가 떠올랐다. 페스트보다도 공포스러운 병이었던 괴혈병에 대해 어떤 의사가 내린 처방이 오렌지 주스였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기 시작한 이래 영국 선원들은 괴혈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오렌지 주스는 강력한 예방 의학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 병이 얼마나 심각했느냐면 싸우다 죽은 사람이 4명이면 괴혈병으로 죽은 사람은 1000명 이상이라고. 오렌지 주스 덕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오렌지 주스 덕에 순조롭게 세계 자원을 수탈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정통 인도 식당을 표방하는 식당에서 마신 진토닉. 다즐링과 아삼이 들어간 진토닉이었다. /한은형 제공

오렌지 주스 말고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도운 것이 있으니 진토닉이다. 인도에서 진토닉이 태어났다는 것만 알았지 이 또한 말라리아 약으로 쓰였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특이한 진토닉을 팔고 있는 인도 식당에 갔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이다. ‘인도 식당에 웬 진토닉이지?’ → ‘아, 진토닉이 인도에서 시작됐지.’ → ‘그런데 왜 진토닉이었지?’

핵심은 진이 아니라 토닉이었다. 말라리아 약의 성분인 퀴닌을 먹기 쉽게 만든 게 토닉워터인데, 토닉워터 특유의 씁쓸한 맛을 가리기 위해 진을 탔다는 이야기. 나는 이 부분이 좀 놀라웠다. 진을 더 수월하게 먹기 위해 토닉워터가 태어난 게 아니라 토닉워터를 돕기 위해 진이 사용되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내가 갔던 곳은 화려한 분위기의 인도 식당이었다. 자칭 인도 전문가에 따르면 한국의 인도 식당은 대부분 인도인이 아닌 네팔인이 운영한다고 하는데, 여기는 정말 인도인이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정통 인도 식당’을 표방하고 있었다. ‘정통 인도’를 상기시키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 식당이 추구하는 바는 좀 화려한 인도였다. 한국에 있는 다른 인도 식당에서 본 적이 없는 음식을 파는 게 좋았다. 향신료 물이라고 할 수 있는 ‘파니 푸리’라든가 인도 남부식 커리라는 타마린드를 넣은 도미 커리라든가.

다른 인도 식당과 가장 달랐던 것은 진토닉이 특화되었다는 점이다. 노스, 사우스, 웨스트, 이스트, 센트럴 하는 식으로 인도의 지역성을 강조한 진토닉이 있었다. 메뉴판을 보는 순간 알았다. 인도식 진토닉이라는 것은 곧 향신료를 넣은 진토닉임을. 향신료! 바로 이게 이 식당이 추구하는 화려함의 요체였다. 그러니까 대항해 시대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향신료를, 그 정서를 감각하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달까.

나는 노스와 웨스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이스트를 골랐다. 노스에는 사프란이, 웨스트에는 카다멈이 들었대서 혹하다가 결국 다즐링과 아삼을 넣은 이스트를 선택한 것. 사프란도 좋고 카다멈도 좋지만 다즐링과 아삼으로 만든 진토닉을 고른 것은 내가 인도에 간다면 가고 싶은 곳이 다즐링과 아삼이라 그랬다. 다즐링과 아삼의 홍차 잎은 향신료인가, 향신료가 아닌가? 오렌지색 술 밖으로 솟아오른 거대한 네모 얼음을 보면서, 얼음 안에 든 허브를 보면서 낯선 향기가 나는 나라에 온 것 같았다. 그렇게 인도의 동쪽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