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창 밖으로 3월의 눈이 내리고 있다. 난 해마다 3월이 되면, 이제는 고인이 되신 배우 백성희·장민호를 떠올리며 연극 ‘3월의 눈’을 생각한다. 이전엔 미처 몰랐지만, 3월에도 눈이 내린다. 어느 해는 폭설이 내려서 3월에 ‘뭐 이리 큰 눈이람’ 하고 오래 기억이 남을 때도, 또 어느 해에는 설핏 싸락눈이 흩날려서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지날 때도 있지만, 3월에도 눈이 내린다. 계절은 소리도 흔적도 없이 바뀐다고 생각했지만, 그 경계에서 그들은 인사를 나눈다. 난 이제 그만 떠날게. 겨울이 봄에게 슬며시 마지막 인사를 한다.
연극 ‘3월의 눈’의 주인공은 집이다. 장오(장민호)와 이순(백성희)이 팔십 평생을 보낸 오래된 집, 노부부보다 나이 먹은 한옥집. 손때 묻은 대들보는 번듯하게 잘생겼다. 안방과 건넌방을 잇는 좁은 툇마루에는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이 세월과 함께 새겨져 있다. 전쟁 통에 피란 갔다가 혼자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온 이순을 살린 건 장오였다. 가족 모두를 잃고 넋이 나간 이순에게 준치가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툇마루에 올려놓으며 처음 장오가 한 말은 “밥 먹읍세다”.
가시 많은 준칫국을 나눠 먹은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 월북해서 30년째 소식이 없는 아들을 툇마루에 서서 기다리는 이순의 머리 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는 노숙자 황씨를 불러 툇마루에 앉혀 따뜻한 국 한 그릇 내어주던, 그렇게 나이 먹은 그 툇마루는 이제 손주의 빚을 갚기 위해 내놓은 이 한옥집에서 가장 먼저 뜯겨 나갈 신세가 된다.
내일 아침이면 집을 떠나야 하는 장오는 아침 일찍 머리를 자르러 이발소로 나섰다가 지저분한 머리를 그대로 둔 채 대문으로 들어선다. 오랜 단골이던 이발소가 마을의 개발로 50년 영업을 끝내고 문을 닫아 버렸으니 낭패다. 그런데 이순은 난데없이 집의 문종이가 영 보기 싫으니 창호지를 사 오란다. 투닥투닥하는 노부부의 대화 끝이 누구 뜻대로 되는지 지켜보는데, 슬며시 웃음이 난다. 급기야 이순이 벌떡 일어나 말짱해 보이는 문종이를 그야말로 ‘푹푹’ 뚫어 버린다. 이 장면이 어찌나 좋은지, 볼 때마다 큰 소리로 웃는다. 팽팽하고 하얀 문종이가 뚫리는 걸 보면 내 마음이 다 후련하다. 부부라는 그 오래되고 팽팽한 긴장 관계를 푹푹 뚫어 버리는 시원함. 창호지처럼 비칠 듯 말 듯 그 속을 알 것 같다가도, 절대로 알 수 없는 부부의 시간이여.
공연 당시 여든이 넘은 배우 백성희가 꼿꼿하게 일어나서 창호지를 뚫고 장오를 돌아보는 폼새가 마치 소녀 같았다. 장오는 화를 낼 법도 한데, “헛 참” 하며 혀를 차는 게 전부다. 그들의 오랜 사랑과 신뢰를 이보다 더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 어느 날은 고집부리는 이순에게 장오가 버럭 고함을 질렀거나, 또 어느 날은 그런 장오에게 서운한 이순이 눈물 짓거나, 그런 날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부부는 서로를 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결국 장오는 창호지를 사러 외출한다.
‘3월의 눈’은 3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하루를 담은 연극이다. 그 하루 동안 노부부와 한옥집의 50년 인생이 담백하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부부가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많은 고비가 있었음을 안다. 장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순도 사실은 먼저 세상을 떠난 존재임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 장오는 집을 떠나며 이순과도 비로소 이별을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손주 집으로 이사를 간다 했지만, 사실 한옥집을 판 돈으로 손주 빚 갚고, 손주 며느리 카페 차리는 일에 돈을 보태고는 요양원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 날들을 정리한다. 죽은 이순이 살아 있는 장오의 어깨를 안아주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3월의 눈이 흩날린다. 백성희와 장민호, 두 배우를 오롯이 비추는 핀 조명 아래서 객석은 더욱 어둠에 휩싸이고,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울었다. 이순이 푹푹 창호지를 뚫을 때마다 웃었던 것처럼, 서로를 품에 안은 노부부의 머리 위로 눈이 나리는 장면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울었다. 늙은 내 부모가 생각나서, 살다가 이별했던 사람들이 생각나서.
모든 걸 비워주고 나가는 장오 곁에는 이제 이순도 없고, 추억이 쌓인 집도 없지만, 그렇게 담담하게 맞이하는 이별도 있는 법이다. 장오는 흐느끼는 손주 며느리를 다독여 보내고 난 뒤, 다음 날 새벽 마중도 배웅도 없이 집을 떠난다. 대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뜯겨져 나가는 집이 애처롭게 앓는 소리를 낸다. 분주한 소란의 와중에, 외떨어진 섬처럼, 이순은 툇마루에 앉아, 황씨는 마당에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3월,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