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의 레벨은 ○입니다.
이를테면 IT 대기업 네이버 직원들은 이런 통보를 받게 될 전망이다. ‘레벨제(制)’를 도입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근속 연수 등 소위 ‘짬밥’과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성과를 측정해 레벨을 매긴 뒤 추후 보상과 연동하는 인사 평가. 네이버는 일찍이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등의 직급제를 폐지했다. 수평 문화 진작을 위해 임원급인 ‘리더’를 제외하면 모두 ‘팀원’이다. 그랬는데, 이제부터는 등급(7단계)을 매기겠다는 것이다. 올해 시범 운영을 거쳐 내년 3월 본격 시행 예정이다.
이번 시도가 눈길을 끄는 것은 올해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의 경영 복귀와 맞물린 데다, 이미 5년 전 꺼냈다가 내부 반발로 무산된 카드이기 때문이다.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경쟁을 유도해 사내 분위기를 쇄신해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타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지만, 인정 욕구와 보상 심리를 자극해 성취를 끌어올리려는 전략. 이해진 창업자는 2012년 사내 강연에서 “NHN을 동네 조기 축구 동호회쯤으로 알고 다니는 직원이 적지 않다”고 질타한 바 있는데, 이번에도 기강 다잡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수평에 수직 더한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 기업 전반에 ‘조직 수평화’ 열풍이 불어닥쳤다. 신속하고 유연한 소통이 혁신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되면서 임원 이하 직급을 통폐합하는 문화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차장님’ ‘부장님’이 사라지고 호칭은 ‘님’으로 통일됐다. 구글 등 유명 글로벌 기업의 성공 모델을 따라 아예 영어 이름만 강요된 경우도 있다. 20대 신입과 50대 고참도 표면상 동등한 구조가 마련됐지만, 승진이라는 가시적 성장 목표가 사라지면서 사기가 떨어졌다는 불만도 이어졌다. 사기 저하는 기업 입장에서도 리스크일 수밖에 없다.
그러자 일종의 비공식 승진, 레벨제가 부각됐다. 연차는 낮아도 높은 레벨을 얻어 더 많은 보상을 받으면 더 큰 생산성을 낳게 되리라 판단한 것이다. 2015년 쿠팡을 필두로 속속 도입이 시작됐다. 일례로 롯데온은 2022년 사내 직급을 팀장·팀원으로 단순화하고 ‘커리어 레벨제’(8단계)를 도입했다. 연 2회 평가를 통해 레벨 상승을 검토하는 방식. 기존 체계에서는 신입이 수석까지 승진하는 데 약 13년이 걸렸다면, 레벨제에서는 빠르면 7년 안에 ‘만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곳 직원은 “직급이 없어 편안한 분위기는 유지하면서 수익과 관련된 동기 부여도 된다”고 말했다.
레벨제 ‘스테이지 업’을 운영하는 카카오 측은 올해 초 레벨을 기존 6단계에서 7단계로 늘렸다. 관계자는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하나 더 만들어 목표 의식을 고취하고 동기 부여하려는 차원”이라며 “조직 수평화가 자리 잡으면서 ‘내가 어느 정도에 와 있나’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존재했는데 이를 해소하려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나 혼자만 레벨 업?
젊은 세대에서는 대체로 환영 분위기가 감지된다. 2022년 현직 회사원 664명 대상 레벨제 관련 설문 조사(인크루트)에서 응답자의 69.7%가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1~2년 차(82.1%), 3~4년 차(71.6%) 직원들의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지난 14일에는 Z세대 구직자 1859명 대상 설문 조사(진학사 캐치) 결과가 발표됐는데, 응답자의 72%가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과 중심의 평가(43%)’ ‘연차와 상관없는 빠른 승진’(41%) 등의 보상이 그 이유였다. 반대 의견으로는 ‘내부 경쟁 심화 우려(42%)’ ‘단기 성과만 강조될 가능성(25%)’ ‘평가 기준 모호’(20%) 등이 제기됐다. 직장인 한모(38)씨는 “필요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일은 아무도 안 하려고 할 것”이라며 “경쟁이 심해지면 협동이 필요한 프로젝트에서도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커머스 기업 티몬은 2022년 7월부터 ‘게임식 레벨제’를 실시했다. 온라인 게임하듯 경험치를 쌓아 매달 레벨(총 25단계)을 올릴 수 있는 파격 제도였다. 성과 기여도에 따라 포인트를 얻고, 포인트가 꽉 차면 레벨이 상승하며, 해당 레벨만큼 인상된 급여를 받는 구조. 자신의 성장세를 시시각각 확인하며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직원 대다수가 20~30대임을 고려해 빠른 동기 부여 방법을 고민한 결과”라는 설명이었지만, 실행 2년 만에 대규모 미정산 사태로 사세가 몰락한 탓에 실험은 빛이 바랬다.
◇위계 싫어도 상승은 원해
레벨제는 위계 질서를 제거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위계를 또한 필요로 하는 국내 기업 현실의 복잡한 단면이다. 영국 셰필드대학교 한국학 교수인 마이클 프렌티스는 한국의 기업 문화를 체험하고 이를 책(‘초기업’)으로 정리하기 위해 직접 1년간 국내 철강 회사 인사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했다. ‘탈위계’ 바람이 거세던 2014년, 그는 해당 회사에서 진행한 설문 조사를 통해 예상치 못한 이율배반적 열망을 발견한다. 대부분의 직원이 줄 세우기식 관리 문화가 업무 의욕을 떨어뜨린다고 불만을 표하면서도 “성과 인정도 잘 이뤄지는 일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등한 ‘참여’와 차등적 ‘구별’이라는 이상이 혼재된 것이다.
그해 KT가 4년 만에 직급제를 부활시켰다. 이듬해에는 한화그룹이 3년 만에 직급제로 되돌아갔다. 직원 사기 진작 도모가 그 이유였다. 프렌티스 교수는 회사를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위계화되기를 바라는 곳”이라고 분석했다. “‘팀장’처럼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는 것은 대기업이 여전히 계층 이동성과 관련해 중산층의 요충지로 남아있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나는 구별과 참여 사이의 긴장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안타깝지만 애당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력만이 유의미할 뿐이다.”
◇한국식 수평주의의 미래는
레벨제의 가장 큰 불안 요소는 ‘객관적 평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국내 항공업계 최초로 레벨제를 검토했던 에어프레미아가 지난해 말 도입을 사실상 중단한 배경이기도 하다. “개발 직군처럼 성과 평가 기준이 비교적 명확한 분야가 있는 반면 승무원 등의 업무에서는 다소 모호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며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전면 보류를 결정했다”고 했다. 아직은 레벨제가 IT나 디지털 업계 위주로 제한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이유다.
한 대기업 직원(39)은 “겪어 보니 말이 좋아 레벨 1·레벨 2·레벨 3지 그냥 사원·대리·과장의 다른 말”이라며 “조직 경직성을 야기한 게 직급제라지만 레벨제에서도 윗사람한테 잘 보여야 올라가는 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인사 관리 전문가 김주수 휴넷 리더십센터장은 “직급 문화가 익숙한 국내에서는 레벨을 직급과 동일시하게 될 수 있다”며 “전문성과 직무 능력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고 신뢰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