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長考)의 상징과도 같은 바둑, 이제는 옛말이 돼가고 있다.

10초, 9·8·7·6·5·4·3·2·1…. 국내 최대 규모 바둑 대회 KB국민은행바둑리그는 이번 시즌 파격을 택했다. ‘10초 룰’을 도입한 것이다. 기본 시간 1분, 그리고 추가 시간을 단 10초만 준다. 기본 시간 1분은 금세 소진되고, 곧 10초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만약 착수에 9초가 걸렸다면, 다음 차례에는 11초(10초+1초) 안에 돌을 둬야 한다. 1초 만에 착수했다면, 다음 차례에는 남은 9초(10초-1초)를 벌어 추가 시간을 19초 얻는다. 숨가쁜 초싸움, 제때 못 두면 시간패(敗)다.

재미 때문이다. 바둑 인구는 줄고 국내 유일 바둑학과(명지대)마저 끝내 문을 닫았다. ‘신선놀음’에 비유할 만큼 느긋하던 바둑에 위기감이 팽배해진 배경. 게다가 국내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프로야구조차 투수가 20초 내에 공을 던져야 하는 규칙을 신설할 정도로 스피드는 모든 스포츠의 핵심이 됐다. 한국기원이 대책 회의 끝에 체스의 ‘피셔 룰’을 들여온 이유다. 활력을 위한 긴급 처방. 원성진(40) 9단은 “역대 가장 빠른 초속기로 바뀌면서 나이 든 기사가 약할 것이라는 평이 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준비해 편견을 깨겠다”고 말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5시간 이상, 심하면 1박 2일까지 늘어지던 대결이 30~40분으로 확 짧아진 것이다.

지난 23일 심재익 7단(남은 시간 4초)과 신진서 9단(4분 18초)의 대국 장면. 시간 격차가 엄청나다. 그만큼 신진서가 매회 빨리 착수해 시간을 저축했기 때문이다. 신진서가 완승을 거뒀다. /바둑TV
지난 23일 심재익 7단(남은 시간 4초)과 신진서 9단(4분 18초)의 대국 장면. 시간 격차가 엄청나다. 그만큼 신진서가 매회 빨리 착수해 시간을 저축했기 때문이다. 신진서가 완승을 거뒀다. /바둑TV

이제는 정장 차림이 아니라 축구 선수처럼 ‘유니폼’을 입고 바둑을 둔다. ‘심박수’도 달라졌다. 대회를 중계하는 바둑TV는 선수들의 심장 박동 수치(♥)를 화면에 띄우기 시작했다. 스마트 시계를 채워, 포커페이스 아래 요동치는 긴장감을 시각화한 것이다. 시즌 개막전을 장식한 박정환 9단은 “워낙 새가슴이라 심박수가 가장 높게 나올 것 같다”던 엄살을 증명하듯 대국과 동시에 심박수가 149까지 치솟는 의외의 명장면을 연출했다. 대회 유튜브 영상 조회 수도 덩달아 뛰었다.

“이건 바둑이 아니다”라는 반발도 거세다.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돌을 놓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한 바둑 애호가는 “일반 시합에서는 선수가 장고에 들어가면 ‘나라면 어디에 둘까?’ 생각하느라 기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데 이제는 그럴 여유도, 해설진의 참고도를 보고 배울 시간도 부족하다”고 했다. 흔치 않은 ‘오심’ 논란까지 벌어졌다. 지난달 27일, 강승민 9단이 급하게 79번째 수를 두었다. 문제는 초시계를 먼저 누르고 사석(死石)을 들어냈다는 것. 또 착수한 손이 아니라 반대 손으로 초시계를 눌렀다는 것. 심판은 경고와 함께 각 벌점 2집을 부여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경기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개입 타이밍을 놓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심판은 심판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스피드는 세계적 추세. 최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난양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가 국제 대회로는 처음 ‘피셔 룰’을 적용했다. 다만 여기서도 기본 시간 2시간, 매 추가 시간 15초로 그 나름대로 여유가 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맞춘 시도였지만 팬들의 반응이 엇갈리고 선수들도 여러 실수를 범했다”며 “올해 이후 ‘10초 바둑’은 프로 대회에서는 운영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