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동생이 결혼한다는 기쁜 소식. “둘이 하나 돼 평생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겠다”는 청첩장 문구에 미소 지으며 시간을 보니 ‘토요일 오후 3시 30분’.
도심 시위에 교통 지옥 뚫고 오가려면 앞뒤로 다른 일정 잡기도 애매하다. 까짓 주말 하루, 축하에 장렬히 바치련다.
이어 절체절명의 고민이 찾아온다. 점심을 먹고 가야 하나, 굶고 가야 하나. 식사 먼저 할 순 없나? 그래 봤자 30분 전이라고? 호텔 본식 끝나고 단체 사진 찍고 4시 반은 돼야 스테이크에 칼 대보겠다. 그날은 강제 1일 2식이다. 그럼 아침을 얼마나 늦게 먹어야 하지…?
그리고 다음 주, “한결같은 6년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동료의 모바일 청첩장에 동공 지진이 일어난다. ‘일요일 오후 4시.’
봄 웨딩 시즌, 이렇게 애매한 결혼식 시간이 많아졌다. 원래 국수 먹는 ‘국룰 타임’은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2시, 또는 5~6시. 식사 시간을 비켜 가는 결혼식은 드물었다. 일요일은 종교 활동 혹은 휴식의 날이어서 기피했다.
여기까진 옛날이야기다. 한 외국계 회사 직원은 “요즘 지인 결혼식이 거의 토요일 오후 3~5시더라. 신랑 신부 직장이 서울인데 의정부에서 하는 일요일 오후 3시 결혼식도 다녀와 봤다”고 말했다. 소셜미디어에선 “하객 편의는 안중에 없는 민폐 결혼식” “축의금만 보내고 밥 먹으러 오지 말란 소리” 같은 뒷담화도 나온다.
신랑 신부와 혼주를 탓하지 마시라. 이게 다 예식 비용이 억 소리 나게 치솟는 ‘웨딩플레이션(wedding+inflation)’ 때문이다.
우선 예식장 자체가 태부족하다. 현재 전국 예식장은 700여 곳. 지난 6년 새 300곳이 사라졌다. 상당수가 코로나 때 폐업했다.
반면 결혼식은 늘었다. 지난해 혼인 건수는 22만여 건으로, 전년 대비 15% 급증해 1970년 집계 이래 최대 폭으로 늘었다. 코로나로 미뤘던 결혼이 몰린 데다, 1990년대생인 ‘2차 에코붐 세대(베이비붐 세대의 자녀)’가 결혼 적령기에 진입하면서다.
예식장 잡기가 전쟁이 됐다. 봄·가을 성수기 유명 예식장의 토요일 점심 시간대는 1~2년 전 예약이 마감된다. 온라인·전화 예약 창이 열리는 시각 ‘성사 시 상금 XX만원’을 걸고 지인 수십 명을 동원해 클릭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지자체마다 공공 예식장을 마련했지만, 결혼식만큼은 화려한 곳에서 남부럽지 않게 하고 싶다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부모 상견례 전 예식장부터 잡는 게 순서” “택일은 점쟁이가 아닌 예식장 사정으로”란 말이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 결혼 정보 회사 가입 때 “내년 가을 강남 호텔에 예식장 잡아놨다”며 배우자감을 찾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 예약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거나, 급하게 날을 잡아야 한다면 ‘토요일 4시’ ‘황금연휴에 낀 일요일’ 같은 기피 시간대나 외곽 예식장밖에 없다는 것.
요즘 결혼식 대관료나 식대는 부르는 게 값이다. 인기 식장 토요일 황금 시간대는 ‘식사 보증 인원(밥값을 내는 최소 인원)’이 통상 300~400명부터 시작한다. 좌석은 200석인데 “예식은 서서 보면 된다”며 300인분 이상 식사 보증 인원을 걸라고도 한다. 그놈의 ‘일생 딱 한 번’ 마케팅에 예식장과 결혼 관련 업체들 매출은 급증했다.
지난해 결혼한 한 공무원은 “같은 식장의 토요일 점심과 일요일 오후 비용이 1000만원 넘게 차이 나더라”며 “또 12~1시 결혼이면 신랑 신부는 새벽 4~5시부터 준비하는데, 요즘 화장·도우미 비용에 ‘얼리(early) 할증’이 붙어 부담이 가중된다”고 전했다.
대관부터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까지 치솟는 물가에 각종 황당한 추가금이 붙는 복마전 결혼 시장, 가성비 따지면 욕 좀 먹더라도 ‘이상한 시간대’가 커플들에겐 차선책이 된다.
하객의 위장이 아우성치면 좀 어떠랴. 새출발은 실속 따져 정성껏 하면 된다. 세월 지나면 내 결혼식조차 몇 시는커녕 몇 년도에 했는지도 가물가물해지는 날이 오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