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는 왜 뻔하고 또 뻔한가. 재미보다 의미를 추구하고, 하고 싶은 말보다 그럴듯해 보이는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최근에 간 결혼식에서 깨달았다. 아주 상큼한 축사를 듣고서. 신부 친구의 축사가 상큼했던 것은 하고 싶은 말을 해서라고 생각한다. 신부 친구가 흔히들 ‘하객룩’이라고 하는 안전한 차림이 아니라 검정 가죽 블레이저를 입은 걸 보고 기대하긴 했지만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누구야, 누구랑 행복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노래하고 춤추고 술 먹자.

박수가 별로 없다고 느낀 것은 그냥 내 느낌일까? 신부 쪽은 모르겠지만 나의 친가인 신랑 쪽은 보수적이고 경직된 편.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다. 그래서 저 축사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씨 일족의 성격상 속으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신랑과 신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것도 한씨 일족의 특성 탓이다. 신랑의 가족은 자랑하는 게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친척들도 역시 없어 보이기 싫어 묻지 않기에 그렇게 되었다. ‘첫 직장이었던 이노션에서 만난 친구’라는 가죽 블레이저님의 말이 아니었다면 신부가 광고 회사에 다녔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앉은 피로연 테이블이 가죽 블레이저님의 근처였더라면 물었을 것이다. 무슨 술을 마시는지, 무슨 술을 좋아하는지, 어떤 이유로 그 술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술집은 어떤 데인지 등등. 나 역시 한씨 일족의 피를 받았기에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고 수줍은 편이나 다소 뻔뻔한 면도 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꼭 알아야 하고, 그러면 물어야 하므로 뻔뻔해진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극도로 드물지만 이런 일이라면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게 나다. 내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까운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뻔뻔하냐고 해서 ‘뻔뻔해지는군’이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술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와 종종 그녀들 생각을 하다가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칵테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니 왜? 대체 왜? 그녀들은 누군지도 모를 내가 그녀들 생각을 하며 어울리는 칵테일을 생각하고 있다니, 그녀들이 안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 일인가. 하지만 떠올리고 말았다. 푸릇푸릇한 그녀들이 노래하고 춤출 때 마시면 좋을 칵테일을 말이다. 친구들끼리의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좋고. 이게 만약 영화의 한 신이라면, 이 칵테일은 이렇게 소개되어야 한다. “어른을 위한 민트셰이크.”

민트빛이 나는 달콤한 칵테일 '그래스호퍼'. /게티이미지뱅크

그래스호퍼(Grasshopper)다. 그래스호퍼는 메뚜기를 뜻하지만 풀밭을 뛰어다니는 생생한 다리들도 떠오르지 않나? 푸릇푸릇한 이들이 활기를 발산하며 뛰어다니기 전에 그래스호퍼를 마시면 딱이겠다는 생각. 부스팅 음료랄까요. 몇 달 전의 나는 대학 신입생에게 바로 이 술, 그래스호퍼를 추천하기도 했었다. “성인이 되면 칵테일을 마시겠다고 별러왔다”며 “인생 처음으로 술을 마시려 하는데 칵테일 한 잔을 골라 달라”고 했던 것이다.

스무 살을 맞이하며 마시는 첫 술이라! 뭐라도 좋을 듯하지만 전 푸릇푸릇함이 떠오르는 그린 계열 술을 추천합니다. 그래스호퍼, 메뚜기라는 뜻이고요. 바를 돌아다니며 술 마시는 일을 바 호핑이라고 하는데 이 술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메뚜기처럼 여기저기로 힘차게 뛰어다니며 세상 구경하시라는 뜻에서 이 술을 추천해보아요.

뭐, 나는 이와 비슷하게 그래스호퍼를 추천하는 이유를 말했었다. 그녀들, 신부와 친구들도 그 마음 잃지 말고 뛰어다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래스호퍼를 떠올린 듯하다. 하지만 제 마음은 전하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