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3일 제주도 무장 폭동을 주도한 김달삼은 현재 북한의 현충원에 해당하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묘비에는 ‘남조선 혁명가’라 적혀 있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단 일원으로 선출됐고, 6·25전쟁 발발 후 북한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전쟁 전 남파돼 유격대 활동 중 죽었다는 설도 있다. /우남위키
1948년 4월 3일 제주도 무장 폭동을 주도한 김달삼은 현재 북한의 현충원에 해당하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묘비에는 ‘남조선 혁명가’라 적혀 있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단 일원으로 선출됐고, 6·25전쟁 발발 후 북한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전쟁 전 남파돼 유격대 활동 중 죽었다는 설도 있다. /우남위키

나는 나이 많으신 분들과 옛날 얘기 나누기를 즐겨 한다. 책으로 보는 역사와 달리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현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오사카에서 제주도 출신 할머니들과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세 분이었는데 각각 1930년생(김모), 1935년생(김모), 1939년생(한모)이었고, 그 중 35년생과 39년생, 두 분은 같은 마을 출신이었다. 제주 4·3에 대해 이렇게 생생한 증언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9년생: 4·3이라고 아세요?

나: 언론에서 듣기는 했죠. 그때 제주도 주민이 많이 희생됐다죠.

39년생: 많이 죽은 정도가 아니에요. 그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도 죽었어.

나: 누가 죽인 거죠?

35년생: (끼어들며) 이북 사람들이 죽였지.

나: 이북이라고요? 북한에서 사람이 왔다는 건가요?

39년생: 이북 사람이 왔다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받았다는 거지. 그때는 낮밤이 바뀌는 세상이었어. 낮에는 남쪽 세상이고 밤에는 이북 지령 받는 사람들 세상.

나: 왜 죽인 거죠?

39년생: 그때 우리 아버지가 면사무소 계장이었어. (35년생이 끼어들며) 아주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멋쟁이였어. 난 아직도 기억 나.

나: 무슨 인민재판 같은 걸 한 건가요?

39년생: 그런 거 없어. 그냥 죽였어.

39년생: 그냥 막 찔러 죽였어.

나: 죽창으로요?

39년생: 죽창이 아니고.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쇠꼬챙이인데, 그걸 날카롭게 갈아서. 그걸로 그냥 막 찔러. 그때 내가 아홉 살이었는데 아직도 기억 나.

나: 살아남은 가족은?

39년생: 우리 엄마는 살았지. 그런데 나중에 엄마도 병으로 죽었어. 그때 참 힘들었다. 형제들이 도와줘서 살았지.

나: (35년생에게) 할머니네 가족들은요?

35년생: 우린 죽은 사람은 없어. 놈들이 온다는 걸 알고 미리 도망갔거든. 대신 그 놈들이 우리 집을 홀랑 태웠지.

나: 왜 그런 짓을?

35년생: 내가 오빠가 셋인데, 다들 군대 가 있었거든. 군인 가족이라고 그런 거지.

나: (30년생에게) 할머니네는 괜찮으셨어요?

30년생: 그때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서 정유소를 했어요. 대신에 우리 사촌집에서 우리를 지켜 줬어. 사촌집이 경찰서장이었거든.

나: 일본에는 왜 오신 건가요?

30년생: 나중에 엄마가 아빠 따라 일본으로 가고 나서 나한테도 계속 오라고 하더라고. 그때 나는 졸업하고 제주 세관에 근무했는데 (제주도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더라고. 무서워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제주4·3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뉴스1

매년 4월 초만 되면 제주4·3 사건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거기서 4·3은 ‘국가 폭력’이라고 회자되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4·3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될 우리 역사의 슬픈 대목이다. 그러나 나와 대화를 나눴던 이 할머니들도 ‘국가 폭력’의 희생자인가?

단지 아버지가 면사무소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고, 오빠들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살던 집이 방화당하고, 단지 세관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할까 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것도 ‘국가 폭력’인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폭동을 일으켰다. 제주도 내 경찰 지서 12개를 습격했고 경찰, 공무원, 그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 후로도 ‘선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죽이거나 공무원과 그 가족에 대한 학살을 이어나갔다. 처음에 폭동의 목적은 선거 방해였지만,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인하며 정부 자체를 상대로 항쟁한 것이다. 4·3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폭동의 목적 자체는 ‘내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당시 미 군정은 군사력으로 대응했다.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4월 17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했다. 적과의 교전 내지 극도의 사회질서 교란으로 경찰력만으로 질서 회복이 어려울 때 군대를 투입하는 것. 이것이 계엄의 정의라고 한다면 당시 미 군정은 남로당의 내란 시도에 대해 계엄령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후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1948년 10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했을 때, 우리 정부 역사상 최초의 계엄령이 선포되지만, 계엄의 원래 뜻을 새긴다면, 남로당의 폭동에 대응해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기 위해 미 군정이 공포한 제주도 도령(道令)이야말로 이 땅에 선포된 ‘최초의 계엄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담담한 어조로 끔찍했던 과거를 회고하는 할머니들 앞에서 난 속으로 ‘미안합니다’를 수십 번 되뇌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봐야 했던 그 ‘아홉 살 소녀’를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제주 4·3의 ‘국가 폭력’에 대해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 사과한 바 있다. 그러나 나와 대화를 나눴던 이 할머니들이 겪은 ‘공산 내란 세력의 잔인한 폭력’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할까? 공산당의 무자비한 폭력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엄존하는데, 이들을 위해서는 누구 하나 사과 요구조차 꺼내는 사람이 없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