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박병학(왼쪽) 아나운서의 중계방송 모습. 그 옆은 오일룡 복싱 전문 해설가. 사실 그는 스포츠 기자였다 /강성곤 제공
젊은 시절 박병학(왼쪽) 아나운서의 중계방송 모습. 그 옆은 오일룡 복싱 전문 해설가. 사실 그는 스포츠 기자였다 /강성곤 제공

권투 중계의 전설 박병학 선배님을 뵈었다. 87세. 1964년 TBC(동양방송) 아나운서 공채 1기생. 대학 졸업 즈음 마주한 방송국 신입 사원 공고가 그의 운명을 바꿨다. 축구 중계를 하고 싶었으나 선배들 위세에 엄두도 못 냈고 권투를 맡았다. 동양챔피언전 중계에 만족하며 이따금 가던 일본 출장이 즐거웠다.

10년 차쯤 되던 어느 해 점심 먹고 서소문통 회사로 들어가는데 번쩍대는 벤츠가 보였다. ‘회장님이구나’ 길을 비켜섰다. 차창이 열리고 이병철 회장이 말을 걸었다. 삼성의 창업주이자 TBC 동양방송 사주, 호암 이병철(1910~1987) 말이다. “권투 중계 잘 보고 있네.” 미소가 따랐다. 차가 사라져 긴장을 풀었더니만 웬걸 비서가 다가서더니 회장실로 오란다. 맙소사, 그는 복싱광이었다. 해박한 지식에 놀란 것도 잠시. 경쟁사보다 밀리는 게 복싱 프로그램이라는 대목에선 흥분하는 게 아닌가. 자리 뜨기 전 한마디가 귀에 쟁쟁하다. “자네는 내 회사에 있네. 내 부하일세. 그러니까 1등 해야 돼.”

1977년 이역만리 파나마에서 펼쳐진 ‘홍수환 신화’가 이루어진 배경 서사다. 결국엔 금자탑을 이룬 셈이지만, 당시 신문⸱방송을 통틀어 열악한 형편에 엄청난 투자와 위험을 감당한 큰 사건이었다. ‘복싱 왕국’이던 상대 방송국을 일거에 압도하기 위한 승부수였던 셈.

1977년 11월 26일(현지 시각) 파나마. 대한민국 아나운서 박병학(이후 박)은 호텔 커피숍에서 권투 잡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저쪽에서 풍채 좋은 백인이 걸어오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제이 에디슨. 내일 타이틀전의 주심. 박은 복싱 전문 캐스터답게 그를 진즉 알고 있었다. 방송국 영상 자료실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인사를 하고 신분을 밝히곤 “혼자라면 커피 한잔하자”고 했다. 흔쾌히 승낙하는 게 아닌가.

“당신은 매우 정확하고 예리하다. 경기를 순조롭게 이끈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에 꼭 초청하고 싶다. 우리의 가을은 무척 아름답다.” 서툰 영어에 보디랭귀지를 총동원했다. 30분쯤 만났을까. 둘은 호기롭게 악수하고 헤어졌다. 이튿날 경기 당일, 링에 오르는 그와 중계석의 박은 다시 눈인사를 나눈다. 박은 예나 지금이나 대화할 때 으레 미소를 띤다. 말과 표정엔 정(情)이 배어 있다. 에디슨씨가 박에게 호의를 품진 않았을까? 그 감정선이 혹시 홍수환에게까지 닿았던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옳은가 그른가, 정오(正誤)의 가치는 물론 오롯하다. 그러나 사람은 호오(好惡), 좋고 싫음에 더 끌리는 경우가 많다. 세상 이치도 그쪽으로 흘러가지 않던가.

홍수환이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챔피언 결정전에서 상대를 다운시키는 모습. /유튜브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페더급 초대 타이틀 결정전 공이 울렸다. 홍수환은 2회에 4번 다운당하고도 3회에 거짓말처럼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고 챔피언이 된다. 영상을 잘 들여다보면 두 가지가 새롭게 읽힌다. 하나는, 아무리 ‘프리 녹다운(free knockdown·다운 횟수에 관계없이 경기 속행 여부를 판단하는 규칙)’ 적용 첫 매치라 하더라도 심판은 자기 판단으로 KO패를 선언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홍수환은 4번이나 매트에 쓰러졌기에 족히 그럴 만한 상황. 그러나 주심은 외려 홍수환의 눈을 연신 똑바로 마주 보며 ‘더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지?’ 독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하나, 3회 홍수환의 반격으로 카라스키야가 코너에 몰려 로프에 기대어 거의 넘어질 때쯤, 다운을 선언하고 카운트를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카라스키야는 기운을 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되레 공간을 열어 홍수환에게 결정타를 날리게 해주곤 신속히 KO승을 선언한다. 미필적 고의라고나 할까. 에디슨 주심은 실제로 이 경기 이후 징계를 받았다. 편파적 운영을 했다는 죄목. WBA 본부를 둘 정도로 권투 강국인 파나마가 부통령까지 참석한 이벤트에서 굴욕을 당했으니 분풀이가 필요했을 터.

그때부터 5년 후의 비화(祕話). 실제로 에디슨씨는 한국을 찾았다. 국내 권투인들이 마련한 행사에 참석한 것. 당연히 박도 그 자리에 가서 그와 해후했다.

사실 박은 내 직속 상사였다.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KBS맨이 되어 90년대 초 느지막이 부장 직함을 달았다. 나는 저 아래 졸자. 박은 점심 스케줄이 엉키면 늘상 만만한 나를 대타로 불러세웠다. 예의 싱글거리며 “약속 없지?” “있는데요.” “시끄러워. 까불고 있어. 따라와!” 그땐 그랬다. 야만과 낭만이 접붙던 시절. 낡은 그의 스텔라가 매연을 뿜고 달리면 여의도서 신길동 단골 식당까지 5분이면 족했다. 낚시꾼이 주인이던 우럭매운탕집. 세상에서 제일 맛났었다. 지금은 세상 맛없는 짬뽕 체인점으로 바뀌었다.

시대의 우울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혼돈의 모퉁이에서 희망이 싹트는 법. 우리에겐 언제나 그랬듯 위기 극복 에너지라는 카운터펀치가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최근 박병학 아나운서의 모습 /강성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