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지막 직업은 조경사였다. 쉰이 넘어 조경 자격증을 준비하며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공원과 산을 다녔다. 노간주나무, 오리나무, 때죽나무, 개암나무, 구절초, 콩제비꽃.... 이름 모를 들꽃과 나무의 이름을 외웠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굵고 거친 손가락으로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경 자격증 두 개를 땄고 양재 근처의 큰 농원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그 후로 한 대학의 조경 전체를 책임지던 아버지는 겨울에는 돌담과 정원석을 옮겼고 2월 중순부터는 봄 맞을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매일 휴대폰을 붙잡고 새로 심을 꽃을 샀다. 꽃이 마련되면 인부들을 모아 심고, 죽은 것은 걷어내고 또 심었다. 아버지는 농부처럼 해가 뜨고 지는 하루와 사계절에 맞추어 살았다. 그중 가장 바쁘고 또 기다려지는 것은 봄이었다.
서울 도산공원 건너편 좁은 골목 귀퉁이에 자리 잡은 ‘세이지 앤 버터’라는 이탈리안 식당에 갔을 때, 물병과 테이블 위에서 봄을 발견했다. 테이블 몇 개와 기다란 바 테이블이 있는 크지 않은 식당이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주방장은 직접 메뉴판과 물병을 들고 환하게 인사를 했다. 레몬을 크게 썰어 넣은 물병을 기울였다.
100%는 아니지만 식당을 빠르게 판단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메뉴가 너무 많거나 지루하면 안 된다. 남의 것을 따라 하기보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면 우선 자리를 잡고 앉아도 좋다. 당연하지만 많은 곳에서 하지 못하는 다음 기준은 인사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기본은 하듯, 초대를 한 것처럼 밝게 인사하고 자리를 친절히 안내한다면 어느 정도는 안심해도 좋다. 이 집 메뉴는 사랑에 빠진 시인의 시처럼 간결하고 힘이 있었다. 주인장은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했다.
주문을 넣고 잠시 기다리자 구운 빵과 버터가 나왔다. 바삭하게 굽고 올리브유를 친 빵 옆에는 레몬즙을 넣어 맛을 낸 버터가 있었다. 버터를 발라 빵을 입에 넣자 상큼하고 기름진 맛이 입안을 덮었다. 호두나 땅콩을 구운 것처럼 고소한 향이 나는 빵은 그 한쪽만으로도 식사가 어떻게 시작되고 끝날지 가늠할 수 있었다. 나는 오래전에 본 영화 속 대사를 읊조렸다. ‘당신은 내 빵의 버터이고, 내 삶의 숨결이야.’
그다음은 작은 빵 위에 재료를 올려 먹는 ‘브루스케타(bruschetta)’였다. 한쪽은 염장한 대구를 찌고 감자와 함께 으깨어 버터처럼 바르고 그 위에 봄 채소를 꽃다발처럼 쌓아 올렸다. 과일을 먹듯 한입 베어 물자 촉촉한 생선살이 몸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다. 원추리, 달래, 참나물 같은 봄나물을 하나하나 골랐는지 시들거나 풀이 죽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쪽은 마치 이탈리아에 온 것처럼 아티초크, 사과, 버섯을 올리고 고르곤졸라 소스를 뿌렸다.
따로 시킨 계절 샐러드는 양상추나 새싹이 올라간 흔한 것이 아니었다. 브루스케타가 꽃다발이었다면 샐러드는 텃밭에 온 것처럼 버섯, 완두콩, 파스닙(parsnip) 등 여러 채소와 가리비 관자를 굽고 드레싱을 버무려 접시에 담아냈다. 언뜻 보기에는 영국식 정원처럼 무심하게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것처럼 채소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바라보니 누군가 호미를 들고 이른 새벽부터 허리를 굽히듯 모양과 맛을 생각해 접시 위 자리를 잡고 사려 깊게 조리법을 선택한 고민이 보이는 것이었다.
‘파파델레’라고 하여 칼국수의 세 배 정도 넓은 생면을 쓴 파스타는 새우와 레몬 버터를 써서 빠르게 익혀냈다. 그 위로는 처빌(chervil)같이 고급 허브를 톡톡 따서 올렸다. 널따란 생면은 노란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팔락거리며 입속에 들어왔다. 그 나비는 이름 없는 들꽃과 나무를 돌아다니며 땅이 녹고 냇물이 흐르며 아이가 뜀박질을 하는 봄의 냄새를 가득 묻히고 있었다.
식사를 하며 나는 아버지가 이 집에 왔으면 기뻐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아버지는 접시에 올라온 채소와 허브를 보며 자랑스럽게 이름을 외우고 얼마나 키우기 어려운지 혹은 단가가 얼마인지를 세세히 설명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며 일에 긍지를 가지고 어떻게든 누구보다 잘하려 했다. 이 집의 주인장이 작은 풀잎을 다듬어 접시에 올리듯 아버지는 나뭇잎을 어루만지고 봄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다. 지금도 저 하늘 어딘가에 아버지가 있으리라 믿는다.
#세이지 앤 버터: 브루스케타 4조각 1만8000원, 계절 샐러드 2만5000원, 레몬 새우 파스타 2만9000원, 010-2399-1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