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걷기엔 시간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동네 둘레길 산책에서 맛보는 상큼함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 얼마 전 친구들과 선정릉을 걸으며 강남 한복판 왕릉은 도심의 보석임을 절감했다. 맨해튼 센트럴 파크와는 다른 흥취가 있다. 왕조의 흥망성쇠와 인간 애증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형님과 함께 새벽 운동 삼아 선정릉까지 뛰어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1970년대 선정릉 일대는 먼지바람 날리던 신도시 강남에서도 끝자락이었다. 마천루 가득한 오늘날 모습과는 천양지차인 전원 지대였다. 왕릉 산책은 봄날 자연이 주는 평화와 더불어 삶과 죽음을 돌아보게 하는 치유 효과가 있다.
지난겨울 차 타고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강남 내곡동 헌인릉을 찾아갔다. 인적이 드문 겨울 헌릉에 태종과 원경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시대의 풍운아였던 태종 이방원(1367~1422, 재위 1400~1418)은 형제들뿐 아니라 아버지와도 왕권을 다툰 야심가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역성혁명 과정에서 남편에게 누구보다 든든한 혁명 동지였다.
그럼에도 태종은 정치적 동지이자 처남인 민씨 4형제를 죽이고 스승이었던 장인 민제를 숙청했으며 세종의 장인까지 처형한다.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절대 권력의 논리에 충실했다. 하지만 태종의 과감한 개혁 정책과 결단이 나라의 기틀을 닦아 세종 대왕의 태평성대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 태종 이방원 없이 세종 대왕 이도는 있을 수 없었다.
원경왕후와 태종의 처절한 애증 관계는 역사서에 남을 만큼 유명하다. 친정을 멸문시키고 끊임없이 후궁을 들이는 남편을 원경왕후는 용서할 수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으로 얼룩진 사랑과 증오의 드라마였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태종과 원경왕후는 쌍릉 속에 함께 누워 있다.
왕릉엔 죽은 자의 안식처가 주는 정돈된 허무감이 어려있다. 폐허로 남은 유적지를 감싸고 있는 처연함과 허망함도 강렬하다. 10여 년 전 폼페이 유적 앞에 섰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화산 폭발이 한순간에 재로 묻어버린 화려한 고대 도시와 주민들의 삶. 그 후 2000년이 지난 사자(死者)들의 도시 폼페이 파란 하늘엔 영원의 침묵이 흘렀다.
인간은 역사를 돌아보며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고대 로마에선 전차에 탄 개선장군에게 노예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외쳤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영광의 절정에 선 승자에게 권력 무상을 일깨우려는 경고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사적인 권력 다툼을 그치지 않던 그 많은 영웅호걸은 지금 어디에 누워 있는가.
봄꽃이 만발한 가운데 다시 정치의 계절이 왔다. 대통령 후보들이 벚꽃처럼 쏟아진다. 대선이라는 큰 장에서 정치 기술자들과 야심가들이 현란한 책략을 구사하고 화려한 거대 담론을 선보인다. 40여 일 후엔 대권을 쥔 제왕적 대통령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절대 권력의 유혹 앞에 설 것이다. 역대 한국 대통령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왕릉에서 우리는 역사와 만나 현재를 돌아본다. 일세를 호령하던 권력자들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야망과 열정도 모두 허공에 흩어졌다. 꽃잎 흩날리는 바람 아래 능묘엔 정적만 흐른다. 영원히 살 것처럼 질주하던 왕도 결국은 무덤으로 간다.
세상이 소란해도 겨울은 가고 봄이 온다. 동네 천변 산책로엔 꽃이 눈처럼 날린다. 한꺼번에 피었다가 장렬하게 지는 ‘벚꽃 엔딩’이다. 산자락 황톳길엔 걷는 이가 줄었다. 황톳길 열풍이 가라앉은 것일까. 시냇물 소리가 산들바람과 함께 더없이 투명하다. 정치의 계절이 끝나도 우리네 삶은 지속된다. 죽음을 기억하며 이 순간에 충실한 그 삶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