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주소, 전화번호…. 중요한 건 다 적혀 있다. 택배 송장(送狀)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이유다.
1000원짜리 ‘개인 정보 지우개’가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뜨거운 제품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다이소에 출시된 제품. 원체 찾기 힘들어 눈에 띄면 제일 먼저 쟁여둬야 할 필수 아이템으로 소문났을 정도다. 다이소 관계자는 “택배 이용이 늘면서 개인 정보 유출에 민감해진 고객이 많아져 관련 상품을 준비했다”고 했다. 다이소 온라인몰에서는 17일 현재도 품절 상태다. 인상적인 리뷰 하나. “겨우 샀는데 다시 바로 품절되다니, 품질보다 품절력이 놀랍습니다.”
어렵사리 구해 실험해봤다. 두툼한 형광펜같이 생겼는데, 택배 송장 위에 슥 칠했더니 글씨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에탄올 성분 덕에 잉크가 휘발된 것이다. 이전에는 손으로 찢어발기거나, 칼로 도려내거나, 값싼 향수를 뿌리곤 했다. 다소 힘들거나 번거로운 증거 인멸 과정이었다. 다만 일반 종이가 아닌 택배 송장 및 영수증 같은 감열지(感熱紙)에서만 효과가 있다. 혹여나 흔적이 남을까, 아예 글씨를 새까맣게 덮어버리는 ‘블랙’ 제품도 시중에 나왔다.
‘택배 포비아’(phobia·공포증)가 한몫했다. 택배 송장으로 집 주소나 전화번호 등을 알아낸 뒤 범죄에 활용하는 사례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2021년 서울 중계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세 모녀 살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피해자의 사진 속 택배 박스를 확대해 아파트 동·호수를 알아내 스토킹했고, 이후에는 배달 기사로 위장해 집 안에 침입한 뒤 가족을 전부 살해하는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이에 대한 질타가 계속됐지만, 아직 뚜렷한 방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우개로 지우는 것이다.
서울 강북구·경기 화성시 등 여러 지자체가 여성 1인 가구 등에 ‘개인 정보 지우개’를 무료로 제공하는 배경이다. 최루액 스프레이처럼 일종의 호신용품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전남 고흥군은 신청자에 한해 지난 18일까지 지우개 등이 포함된 ‘여성 안심 홈세트’를 지원했다. 군 관계자는 “여성들이 더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방편”이라고 했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국 택배 물동량은 약 51억건. 국민 1인당 택배 이용 횟수는 꾸준히 늘어 99.7회였다.
지우개는 온라인에서도 요긴해지고 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어릴 적 무심코 올린 게시물(흑역사)을 지워주는 ‘지우개’ 서비스를 2023년 시작했다. ‘지’켜야 할 ‘우’리들의 ‘개’인 정보. 신청자는 고등학생(41%)이 가장 많았고, 중학생(34%), 24세 이하 성인(14%)이 뒤를 이었다. 플랫폼별 삭제 요청은 틱톡(35.9%), 유튜브(22.1%), 인스타그램(16.3%) 순. 지난해에만 1만5975건이 처리됐다. 전년보다 약 50% 증가한 수치다. 수치(羞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