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 고부보건지소는 하루에 한두 명 찾을까 말까 하던 한가한 곳이었다. 요즘은 매일 25명 안팎의 환자들로 ‘호황’이다. 지난해 11월 ‘백발의 원장님’이 부임하면서부터다.
임경수(68) 고부보건지소장은 평생 재직한 서울아산병원에서 마지막 임무로 정읍아산병원장을 맡았다가 임기를 마치고 이곳에 눌러앉았다. 동네 사람들은 관성처럼 ‘원장님’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 응급의학과를 만든 응급의료계의 거장. 그가 정읍아산병원장 임기를 마쳤을 땐 연봉 4억원을 제시하는 병원이 많았다. 마침 막내딸이 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생활비가 꽤 많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보건지소장 월급은 300만원. 그는 공보의 신분인 그곳을 택했다. 이 취업으로 월 450만원의 사학연금도 칼같이 끊겼다.

“정말로 생계 문제 때문에 첫 두 달은 매일 ‘그냥 도망갈까’ 고민했어요. 아내와 친구들은 ‘이제 좀 편하게 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타박했습니다. 부부 싸움을 석 달 했지요. 이제는 아내가 지쳐서 포기했나 봐요(웃음).”
고부보건지소는 녹두장군 전봉준과 농민들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서 봉기한 곳, 고부 관아 터(현재 고부초등학교)가 내려다보는 작은 마을에 있었다. 젊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바쁘고 열정적이던 의사. 칠순을 바라보니 여유로운 삶을 누릴 법도 한데, 그는 왜 또 자갈밭을 걷는 것일까.
지난 10일 정읍에서 만난 임 원장은 “평생 처음 와본 이곳에서 경험한 인심이 서울 토박이에게 스며들었다”며 “나이 들어서 빠릿빠릿하지 않고 명의도 아니지만, 의사로서는 요즘이 인생의 황금기 같다”고 말했다. “큰돈은 못 벌었어도 명예는 많이 누렸어요. 그런데 제가 주치의를 맡았던 기업 회장님들이 사주는 고급 호텔 밥보다, 여기 찾아오는 할머니들이 주섬주섬 꺼내는 인절미 한 쪽이 금덩어리 같아요. 말 그대로 사람 사는 맛이랄까요. 저 오래 살 것 같습니다.”
◇‘쓰리고’를 외치는 원장님
여느 지방 소도시처럼 정읍에도 무의촌(無醫村)이 많다. 임 원장은 젊은 공보의가 임기를 마친 고부보건지소에 자원해 임명됐다. 정읍아산병원장으로 2년 반 동안 지방 의료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지 보고 느꼈기 때문이다.
-뭐가 가장 큰 문제입니까.
“전국 장애인 발생률이 5.1%인데 정읍은 두 배가 넘어요. 응급 환자 대부분이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오는데, 그게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치료를 안 합니다. 고혈압·고지혈증·고혈당, 저는 합쳐서 ‘쓰리고’라고 불러요(웃음). 평상시에는 증상이 없거든요. 그러다 10년 안에 합병증이 오는데, 병원이 머니까 결과는 즉사 아니면 편마비예요.”
-옆에서 잔소리하고 관심만 가져도 다를 텐데요.
“보건지소에서 이 쓰리고를 조금만 관리해 줘도 응급실 들어가는 사람이 절반으로 줄어들 거예요. 그럼 열심히 일하고 세금 내야 할 50~60대가 안 아프고, 응급실도 편해지고, 국고 손실·보험 재정 낭비까지 줄일 수 있잖아요. 장애인이 되면 의료비가 4배로 껑충 뜁니다.”
임 원장은 ‘쓰리고’를 외치고 다니는 시골 의사다. 이장 44명을 모아놓고 계속 ‘계몽 교육’을 한다. “처음엔 고상한 말로 설명했더니 아무도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노름에 빗대서 ‘다섯 가지를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노름꾼이 좋아하는 거 뭐예요? 담배. 하루 종일 앉아만 있으니 어때요? 살쪄요. 고스톱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뭐죠? 쓰리고! 고혈압·고지혈증·고혈당(당뇨). 매일 먹는 약, 그거 잘 챙겨 먹어야 됩니다. 담배 끊고 뱃살 빼고요.”
-효과가 있나요.
“금연하겠다는 이장님들이 속속 나와요. 지나가다 만나면 ‘담배 피웠어요 안 피웠어요?’ 소리 질러 물어봅니다. 계속 이렇게 잔소리하고 계몽시키면, 한 7~8년쯤 지나 뇌심혈관계 중증 질환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데이터가 나올 거예요.”
-동년배 의사 얘기라 더 잘 들으시겠네요.
“공보의는 의대 갓 졸업한 선생들이 오니까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못 미더운 게 있나 봐요. ‘손주뻘한테 가슴 열어 보이는 것도 좀 그렇다’고 해요. 저는 오시면 얘기 들어드리고 손 한번 잡아드리고, 그것만으로도 진료실에서 얼굴이 환해져 나가십니다.”
입소문이 나자 요즘은 정읍 시내에서, 인근 부안군 등에서도 환자들이 온다. 이렇다 할 의료 장비도 없는, 청진기 하나로 처방약을 내주는 곳이지만 환자들은 “희한하게 약이 잘 듣는 것 같다” 한다고. “응급의학과 교수 시절에는 환자들과 대화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여기서는 10분이고 20분이고, 푸념이든 투정이든 말씀 다 들어드리니, 그게 약효 이상인가 봅니다. 제가 농담으로 ‘보건소 약은 제일 비싼 것만 있다’고 해요, 하하.”
◇등유 한 통과 온수 매트
임 원장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줬다. 3월 4일 홍삼액, 두유. 3월 5일 겨울 배추, 버스비 무료. 3월 6일 계란, 곶감, 박카스, 현미. 3월 7일 인절미. 3월 10일 딸기, 혁명주.... “아내가 일기를 써보라고 했는데 일상은 단조로우니까요. 매일 환자들이 가져다 주는 것들만 적어뒀어요. 산에서 딴 두릅, 밭에서 금방 캔 겨울 배추 한 포기.... 냉장고가 꽉꽉 찼어요. 주말이면 아이스박스에 대추, 도라지 말린 것 가득 담아 SRT 타고 상경해요. 아내가 좋아하는 입암막걸리도 챙기고요. 원래 와인을 즐겼는데 제가 정읍에 온 다음부터는 둘 다 막걸리파가 됐습니다.”
-살림은 어떻게 하나요.
“정읍아산병원장 시절엔 사택에서 아내와 살았는데, 지금은 보건지소 옥탑방에서 지냅니다. 5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라 아내는 올려보냈어요. 빨래며 청소며 제가 다 하죠. 밭작물은 여기 마트에서 안 팔아요. 라면 끓여 먹을 때 넣으려고 파 몇 뿌리 심어뒀고, 구하기 힘든 셀러리도 한번 길러보려고요.”
-식사는요?
“아침은 식빵 한 쪽에 치즈(분당 집에 다녀올 때 많이 사다 놨다). 점심은 이웃 황토현농협에서 직원 식당을 열어줘서 해결합니다. 저녁은 거의 막걸리 한 잔이죠. 이 동네 사람들은 보니까 소주를 세 병씩 마셔요. 제가 ‘스리고’ 교육 일환으로 ‘술 먹을 거면 나랑 먹자’고 합니다. 막걸리는 배불러서 많이 못 마시거든요. 두부, 채소 곁들여 간단하게 먹을 수 있고요.”
한 달 생활비는 50만원. 왕복 SRT 비용, 옥탑방 전기료·수도료 등 공과금도 포함한 액수다. 차도 아반떼로 줄였지만 거의 버스를 타고 시내를 오간다. 정류장마다 버스 시간표를 외우다시피 한다고. 옥탑방 난방은 취침 전 보일러 1시간, 온수 매트 4시간만 튼다.
-엄청 절약하시네요.
“돈이 없어요. 그나마 처음에는 한 달 30만원으로 살았는데 생활이 핀 거예요.”
-한 달에 30만원이요?
“월급을 300만원쯤 받아요. 사학연금 450만원이 나오니 괜찮겠거니 했는데, 공보의가 되면 연금이 끊기는 줄 몰랐던 거죠. 정읍아산병원장 시절에도 연금 절반은 받았거든요. IRP(퇴직연금)를 일부(1억원) 해약해 가족 생활비로 사용하는데, 제가 더 쓸 수가 있나요. 밤마다 오들오들 떨면서 ‘이거 그만둬야 되나’ 고민했습니다.”
-연봉 4억을 포기하고요.
“저와 약속한 이학수 정읍시장님, 두 친구 얼굴이 계속 맴돌아 결심했어요. 옥탑방으로 이사하면서 한 친구가 등유 한 통을, 다른 친구는 온수 매트를 사줬어요. 처음에는 보일러 실컷 틀었더니 한 달 기름값만 수십만 원 내겠더라고요. 스티커에 그 날짜 1월 18일을 적어 기름통 눈금에 표시해두고 결심했습니다. (보건지소장 임기) 남은 1년 8개월간 이 기름으로 버틴다!”
◇“시니어 의사만 그러모아도”
사학연금 얘기가 나오자 임 원장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성실히 일한 33년간 꼬박꼬박 연금 붓고, 이제 살 날이 15년쯤 남았을 텐데 왜 내 돈을 내가 못 받나. 보건지소장으로 월급 300만원을 받는 동안은 매달 450만원 연금은 그대로 날리는 것.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가 없다. 임 원장은 “나 같은 ‘시니어 의사’를 잘 활용하면 시골 의료 취약 지역을 충분히 메워줄 수 있다”며 “괴상한 연금 제도만 정리되면 기꺼이 시골로 가겠다는 은퇴 의사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주변에 그런 의사들이 많나요.
“60대 의사들 모임이 있는데 열에 한두 명은 하고 싶어 합니다. 복지부에서도 이걸 제도화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정읍아산병원에도 시니어 의사들이 많지요?
“원장으로 부임해서 보니 필수 과가 전부 공석이에요. 제일 먼저 1년 아래 후배 산부인과 교수(이필량 현 보령아산병원장)를 데려왔어요.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까지 한 유명한 의사예요. 부인은 소아과 교수라 ‘원 플러스 원’인데, 월급은 다 못 줬죠. 또 노인이 많으니 전립선 질환이 흔한데 비뇨기과 의사도 없어요. 거기는 2년 아래 후배 끌고 오고 하는 식으로 필수 과를 다 채웠습니다.”
-지금 모두 정읍에 계신가요.
“내가 나오니 많이 떠났어요.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떠난 분들도 ‘나중에 정읍으로 돌아오겠다’ ‘의료 취약지로 가겠다’ 하신 분이 많습니다.”
정읍에는 15개 보건지소가 있는데, 현재 공보의 6명이 돌아가며 진료한다. 의료 인력 구조상 공보의 공급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의료 대란으로 감소세가 더 빨라질 수 있다. 임 원장은 “비급여 항목이 아니면 돈이 안 되니 의사들이 피부과 같은 곳으로 쏠린다”며 “의사 수보다는 그렇게 편중되는 게 문제”라고 했다. “젊은 의사들은 일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자식 교육도 시키고, 시골에 있기 힘들잖아요. 정읍아산병원 응급실을 72세 의사가 맡고 있어요. 그 선생님도 ‘3년 더 봉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노인들 마음은 노인 의사가 더 잘 아니까요.”
-다들 영원한 현역이시네요.
“제가 처음 왔을 때 코로나가 유행이었는데, 내과 선생님들이 코로나 환자를 안 보는 거예요. 환자들이 군산까지 치료받으러 다녔어요. 저는 응급의학, 감염병, 재난을 두루 해 봤으니, 1년 반 동안 아내 도움을 받아가며 코로나 진료를 했습니다. 주말도 없이 많을 때는 하루 400명을 봤어요.”
-정읍에 정이 들 법도 합니다.
“한 달쯤 됐는데 어느 코로나 환자가 다 나았다며 달걀 두 판을 가져왔어요. 뭐랄까, 세상에서 제일 값진 걸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한 판은 직원들 주고, 아내와 한 판을 나눠 먹는 동안 그 짜릿함, 여운이 오래가더라고요. 이게 의사의 보람이지 생각하면서 그때부터 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물었더니 “병원 없는 곳이 많다”고 해 ‘진료 버스’를 기획했다. 서울의 1.14배 크기인 정읍 인구는 10만이 좀 넘는다. 그는 정읍아산병원 ‘진료 버스’를 이용해 병의원이 없는 시골 마을을 돌며 엑스레이도 찍고 검사도 하는 순회 진료를 나갔다. 장소는 농협 조합장들이 제공했다. 인연이 차곡차곡 쌓였다.
◇백발이 그레이 헤어로
-동네 친구가 많으신가요.
“‘주립대학’이라고 정읍 출신 27명 모임이 있는데, 저를 특별히 끼워줬어요. 1년 만에 이 대학 이사장이 됐습니다(웃음). 서울에서는 친구들 보려면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하는데, 여기는 맨날 번개로 5~6명씩 만나요. 저는 ‘독거 노인’이라고 막걸리도 잘 사주고요.”
낼모레면 70이다. 하지만 임 원장의 얼굴에는 해사한 미소가 있었다. 그와 인터뷰하는 동안 환자 두 명이 찾아왔다. 손가락 관절이 아파서 온 93세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진료실 밖까지 크게 번졌다. “관절약은 그것대로 드시고 원래 드시던 혈압약도 빼먹으면 안 돼요.” 현관까지 할머니를 따라 나온 시골 의사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어르신들 말씀을 다 알아들으시나요?
“처음에는 환자들이 ‘거시기, 거시기’ 하면 대화가 안 됐거든요? 그런데 손 꼭 잡고 눈 맞추고 얘기하다 보니 이제는 뭔 말인지 다 알아듣습니다(웃음).”
-정읍 ‘인기남’이신 것 같아요.
“아파서 오신 분들이 오히려 저한테 ‘건강하셔야 돼요’라고 말해요. 덕분인지 저 정말 건강해졌습니다. 마흔 살에 완전히 백발이 됐는데, 여기 와서 검은 머리가 나서 좀 그레이 헤어가 됐고, 뒤통수에도 머리가 더 났어요. 33년 달고 산 지방간도 없어졌고, 혈압도 정상이 됐고요. 보통 사람들이 의사를 치료한 겁니다.”
임 원장은 53세에 경계성 위암으로 시술을 받았다. 그날로 술·담배를 끊고 건강 관리를 해왔는데, 매일 막걸리를 먹는 정읍 생활로 오히려 회춘한 셈이다.
◇“정읍 떠날 수 있으려나?”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였나요.
“음, 의대 합격한 날이요. 제가 흙수저거든요. 돈을 많이 벌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어요. 얼른 개업해 5층 건물 세우고 임대 수익으로 해외여행 다니며 사는 게 꿈이었는데, ‘내시경·초음파까지 배워서 나가면 10층 빌딩을 올린다’는 선배의 꼬임에 응급실장 자리를 맡았다가 인생이 바뀌었어요. 그러고 보면 항상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갔네요.”
외상 사고가 많던 시절, 교통사고로 72시간 내에 죽는 사람이 한 해 1만4000명, 지금의 두 배 수준이었다. 외과 전문의인 그가 외상 처치의 ABC를 몰라 결과적으로 여덟 살 환자를 살리지 못한 일이 사무쳤다. 그 길로 ‘응급의학과’ 만드는 일에 매달렸고, 딱 1년만 응급실을 맡겠다는 결심은 희미해졌다. 5~6년 고생한 끝에 관련법과 응급의학 전문의제가 결실을 봤다.
“그 후로도 대한재난의학회·외상학회·응급의학회 등 안 맡은 일이 없어요.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병을 얻었는데, 쉬어가는 김에 평생 숙제로 남은 일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독초(毒草) 데이터베이스 만들기. 응급실에 독초를 먹고 실려오는 사람이 많은데, 토양마다 달라서 독초는 외국 서적을 보고 공부할 수 없거든요.”
-도전의 연속이네요.
“전국의 산을 다니며 독초의 사계절을 찍어 책을 냈고, 그러다 보니 서울아산병원장이던 친구가 ‘호남의 산에 다니면 어떻겠느냐’고 물어 정읍아산병원장을 맡게 된 거예요. 고부보건지소장도 2년 약속했지만 인생은 또 모르죠. 나, 떠날 수 있으려나(웃음).”
-지금의 귀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지인들이요. 시장님부터 농협 조합장들, 막걸리·반찬 싸주는 식당 사장님들.... 돈이 제일 없는 시기에 또 제일 행복하니 인생은 참 아슬아슬하고 재미있어요.”
서울로 향하는 길, 기자의 손에 임 원장이 주전부리 한 보따리를 건넸다. 탱글탱글한 방울토마토와 사과, 간이 슴슴한 쑥떡과 콩떡. 정읍 인심에 반했다더니, 서울 토박이 의사는 어느덧 정읍 사람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