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는 이 청보리밭 때문에라도 고창으로 달려가 볼 일이다. 푸른 하늘과 청보리가 이루는 단순한 색 대비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사진은 5월 11일까지 '고창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는 '학원농장'.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청보리밭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전북 고창의 ‘고창 청보리밭 축제’가 19일 개막해 5월 11일까지 열린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의 중심 무대인 공음면 ‘학원농장’은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이하 ‘폭속’)’의 촬영지로 등장해 유채꽃 개화와 함께 ‘K드라마 성지’로 인기몰이하는 중. 고창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2013년 5월 지정)이자 세계유산의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덕분에 극적인 풍경이 곳곳에 가득하다. ‘가정의 달’ 황금연휴를 앞두고 가족들과 함께하면 좋을 코스를 미리 가 봤다.

◇애순·관식처럼, 장현·길채처럼

“누가 좋아한다는 말을 이렇게 해?” 여기도 애순이, 저기도 관식이다. 젊은 커플들 사이에선 ‘폭속’에서 주인공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이 유채꽃밭에서 나눈 알콩달콩 대사가 터져 나온다. 현실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학원농장. 다정한 연인들은 애순과 관식이처럼 두 손 꼭 잡고 인생 사진을 남기느라 신난 표정이다. ‘폭속’에서 애순과 관식이 데이트를 즐기던 장면을 촬영한 유채꽃밭이라고 알려지면서 학원농장엔 요즘 드라마를 추억하며 유채꽃을 보러 온 상춘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촬영지인 '학원농장'에선 청보리밭과 함께 유채꽃밭이 장관을 이룬다. 나무 움막은 드라마 '도깨비'의 배경으로 '열연' 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하늘거리는 유채꽃밭 너머에선 청보리가 푸르름을 뽐낸다. 밭 사이 산책로로 들어서니 좌 유채꽃, 우 청보리다. 강렬한 천연색 대비에 잠시 아찔한 현기증이 인다.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이따금 바람이 77만㎡의 광활한 밭을 쓰다듬고 갈 때면 초록 물결이 넘실거린다.

청보리밭 언덕에선 MBC 드라마 ‘연인’에서 남녀 주인공이던 장현 도령(남궁민)과 길채 아씨(안은진)가 꽁냥꽁냥 사랑싸움하다가 입맞춤하던 장면을 촬영했다. 일대는 누구 말마따나 “컴퓨터 ‘윈도’ 바탕화면 속에 들어선 듯” 그림 같은 풍경이다. 다시 언덕을 내려오면 낯익은 나무 움막이 기다린다. tvN 드라마 ‘도깨비’의 도깨비(공유)가 집 현관문을 열 때마다 공간 이동을 했던 그곳. 드라마 속에선 유채꽃과 청보리 대신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으로 나왔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도깨비’ 명대사가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 나온다.

경관 농원으로 운영해 오는 학원농장은 2004년에 전국 최초로 ‘보리’를 주제로 한 청보리밭 축제를 개최한 뒤 해마다 30만여 명이 방문하는 고창 대표 명소로 자리 잡았다. 봄엔 유채꽃과 보리로, 여름엔 해바라기꽃으로, 가을엔 메밀꽃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올해 청보리밭 축제 주제는 ‘드라마 같은 풍경, 영화 같은 하루’. 밭 사이를 오가며 인생 사진 실컷 찍고 출출해지면 식당에서 구수한 ‘보리비빔밥’이나 시원한 ‘메밀국수’ 한 그릇 맛보는 것도 좋다.

◇농부 체험, 바지락 캐기 체험도

자연과 함께하는 체험형 농장을 추구하는 상하면 ‘상하농원’도 목가적 풍경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학원농장에서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다. 매일유업 관계사인 상하농원은 9만9173㎡(약 3만평) 대지를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농장처럼 꾸몄다. 팜 스테이를 테마로 한 ‘파머스 빌리지’, 지역 농축산물로 치즈·잼·빵·햄 등 먹을거리를 직접 만들어보는 공방, 동물 농장, 양떼목장 등을 갖췄다. 각 공간에선 제철 농산물 수확 체험, 동물 먹이 주기, 치즈·햄·딸기 케이크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예약 필수)이 활발하게 진행돼 어린아이를 둔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인기다. 절기에 맞춰 가족이나 성인 대상 장 만들기, 김장 체험도 진행한다. 야외 수영장에 이어 최근엔 수목원도 개장해 즐길 거리가 늘었다.

'상하농원' 동물 농장에서 염소에게 먹이주기 체험을 하는 어린이. 체험형 농장인 상하농원은 가족 여행지로 인기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젖소들을 방목했던 방목장은 젖소들이 퇴거한 후 '목초지 포토존'이 됐다. 목초지 옆으로는 산책길이 이어진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목장길을 따라' 가면 양떼와 만난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들에게 양떼목장은 즐거운 놀이터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빵 공방 주변에선 달콤한 딸기잼 향이, 치즈 공방 주변에선 치즈 향이 발길을 붙잡는다. 동물 농장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마저 동심으로 데려간다. 염소 먹이 주기, 아기 돼지 젖 먹이기 체험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상하농원 직원에 따르면, “얼마 전 태어난 까만 코의 ‘흑비양(黑鼻羊)’도 곧 ‘등판’할 예정”이라고. 젖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던 방목장은 젖소들이 퇴거하고 자연 그대로의 목초지가 됐다.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을 실천하는 카페와 식당에선 친환경 식단을 맛보고, 설치미술가 김범이 건축과 디자인 총괄을 맡아 완성한 농장 곳곳을 둘러보려면 하루가 모자란다. 당일 입장료는 대인 9000원, 소인 6000원.

갯벌 체험은 고창 여행의 또 다른 선택지다. 상하농원 가까이에 명사십리해안과 구시포해수욕장이 있지만, 갯벌 체험은 심원면에 있는 하전리와 만돌리 갯벌 체험장이 유명하다. 전북 갯벌 체험학습장으로 운영하고 있어 전국구 갯벌 체험 명소다.

심원면 하전 갯벌 등은 갯벌 생태체험 학습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 고창군

그중 ‘아름다운 어촌 100개 마을’ 중 하나로 선정된 하전갯벌마을은 10㎞의 해안선과 1200㏊에 이르는 광활한 갯벌을 품고 있다. 전국 최대 바지락 생산지이기도 하다. 5월 3~5일 여는 ‘고창 하전 바지락 오감 체험 페스티벌’ 기간에 찾으면 바지락 무료 나눔, 시식 행사를 비롯해 갯벌 퍼레이드, 바지락 먹거리 장터 등 축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고인돌유적지부터 ‘큰바위 얼굴’까지

특이하게 고창은 행정구역 전역이 생물권보전지역(생물 다양성 보전의 가치가 큰 지역)이다. 생물권보전지역은 다시 핵심·완충·전이 구역(지역)으로 나뉘는데, 람사르 고창갯벌(이하 고창갯벌)과 함께 운곡람사르습지(이하 운곡습지), 고창 고인돌유적지, 선운산 도립공원, 동림저수지는 핵심 구역에 속한다. 인공적인 것을 최소화한 생물권보전지역에선 자연 그대로의 풍경과 만날 수 있다.

울창한 숲 아래 고인돌이 산재해 있는 고인돌유적지에선 원시적인 풍광과 만날 수 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선사시대 고인돌유적지 옆에 벚꽃이 활짝 펴 운치를 더한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그중 운곡습지와 고인돌유적지는 가까이 있어 한 코스로 이어 가볼 만하다. 노약자이거나 걷기가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면 고인돌박물관 부근에서 친환경 탐방 열차인 ‘모로모로열차’(성인 1000원)를 탈 일이다. 열차를 타고 고인돌유적지를 한 바퀴 둘러보는 데 30분 정도 소요된다. 주진천을 지나면 청동기인들의 생활상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죽림 선사 마을’과 유채꽃밭이 양옆으로 이어진다. 산자락에 자리한 고인돌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다. 덕분에 여러 형태의 고인돌을 비교해가며 살펴볼 수 있다.

고인돌유적지 부근에도 유채꽃이 한창이다. 고인돌박물관, 선사 마을 등이 어우러져 있어 봄 나들이 명소로도 인기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고인돌군 옆으로 난 탐방로를 따라가면 운곡습지에 닿는다. 이 습지는 공업화, 산업화가 한창이던 1980년대 초 운곡저수지의 물이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로 공급된 후 30년 넘게 폐경지로 있다가 스스로 복원, 치유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원시 풍경으로 돌아간 습지에는 생물 860여 종(2021 국립생태원 내륙습지 정밀조사 최종보고서)이 서식한다. 운이 좋으면 수달, 담비도 목격할 수 있다.

운곡습지를 걸어서 둘러보려면 3시간은 족히 걸린다. 도보 탐방의 경우 고인돌박물관 부근 탐방안내소에서 출발하면 동선을 절약하게 된다. 운곡습지의 정문에 해당하는 ‘운곡람사르습지 자연생태공원 탐방안내소’ 부근에서 ‘수달열차’(성인 2000원)라 불리는 탐방 열차를 타면 ‘짧고 굵게’ 돌아볼 수 있다.

선운산 도립공원 내 선운사는 천연기념물인 동백군락지 외에 선운사육층석탑<사진> 등 불교 유산을 만날 수 있는 천년고찰이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선운산 도립공원도 생물권보전지역 핵심 구역에 속한다. ‘도솔산’이라고 불리던 선운산 기암괴석 아래 한반도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지점이다. 규모 43.7㎢에 비해 다양한 식물종이 서식한다. 도솔천을 따라가면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검단선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 선운사와 만난다. ‘만세루’ 지붕 보수 등으로 경내는 다소 어수선한 가운데 ‘부처님 오신 날’(5월 5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연등이 탐방객을 맞이한다. 영산전과 대웅전 뒤편의 3000그루 동백 군락이 4월 중순 현재 아직 볼 만하다.

선운사 경내 소원돌을 쌓은 탑 위로 붉은 동백꽃이 내려 앉아 시선을 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도솔암 ‘장사송’, 삼인리 ‘송악’과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40여 년 수령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공원 관계자는 “이곳 동백꽃은 늦게 피었다가 늦게 지는 것이 특징”이라며 “대개 4월 중순까지가 가장 예쁜데 올해는 꽃샘추위가 이어져 꽃을 좀 더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천년 고찰엔 동백 외에도 볼거리가 많다. 대웅전 앞엔 백제 탑 양식을 한 고려시대 ‘선운사육층석탑’이, 대웅전 안엔 보물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등 불교 유산이 기다린다.

선운산 도립공원에서 나와 22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병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창 주요 지질명소 중 하나인 병바위는 마치 병을 뒤집어 놓은 형상 같다 해서 붙은 이름. ‘신선이 술에 취해 술상을 발로 찼는데 술병이 거꾸로 꽂혀 병바위가 되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천강(주진천) 위로 바위를 그대로 비추는 반영이 나타나면 병이 옆으로 누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눈에 띄는 것은 사람의 얼굴 모양의 바위다. 별칭도 ‘고창의 큰바위 얼굴’이다. 마블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그루트’를 닮았다는 뜻으로 ‘그루트 바위’라는 별칭도 있다.

'쓰러진 병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은 '병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압도적 경관과 어우러진 바위는 시간과 자연이 빚어낸 경이로운 작품 같다. 보는 방향에 따라 생김새가 다른 것도 재미있다. 병바위 가까이 전좌바위 절벽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고 있는 ‘두암초당’도 볼 만하다. 조선 중기 고창 출신 변성온·성진 형제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954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영모정 뒤편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닿을 수 있으나 오르는 길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차량 이용 시 아산초등학교 주차장에 주차 후 올라가볼 수 있다.

◇걷기 좋은 읍성 산책도

고창 여행 필수 코스처럼 여겨지는 읍성을 걸어볼 차례다. 둘레 1684m인 고창읍성은 붉은 치마를 입은 듯 철쭉이 더해지는 봄 풍경을 으뜸으로 친다. 고창읍성에서 16km쯤 서쪽에 자리한 무장면 무장읍성은 상하농원, 하전갯벌, 선운사와 가까워 오가는 길에 코스에 넣어볼 만하다. 고창읍성의 유명세에 비해 한적해 조용히 걷기 좋다.

'고창읍성'에 비해 덜 알려진 '무장읍성'은 조용하게 산책하기 좋다. 읍성 안엔 동헌, 객사 등이 남아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이곳 이금주 문화관광해설사는 “무장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 병마사 김저래가 백성과 승려 등 2만명을 동원해 2~3개월 만에 쌓았다고 전한다”며 “읍성을 포함해 무장 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 역할을 하는 등 관계가 깊다”고 했다. 객사, 동헌, 진무루 등이 남아 있고 연못과 정자, 성 등은 복원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읍성의 남문이자 정문 역할을 한 진무루는 무장읍성 복원 전 오랫동안 무장초등학교의 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무장읍성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던 '진무루'. 무장읍성 복원 전 무장초등학교의 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둘레 1147m의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면 20분 정도 소요된다. 이따금 바람 타고 날리는 벚꽃비를 맞으며 걷는 재미가 있다. 읍성 안 야트막한 ‘사두봉’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 전설이 깃든 커다란 느티나무 옆에 송덕비가 배웅하듯 이어진다. 선정을 펼친 원님 등의 공덕을 기린 비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비문에 적힌 그 옛날 그 원님처럼 선정을 펼칠 이 시대의 원님을 생각하며 읍성을 나섰다. 성벽을 따라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