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들 벚꽃 지듯 떨어져 나가네.” “중도 운운하는 배신의 정치는 설 곳이 없다!”
지난 주말, 국민의힘 대선 경선 주자였던 오세훈 서울시장과 유승민 전 의원이 불출마나 경선 불참을 선언하자 쏟아진 보수 강성 지지자들의 반응이다.
온건 보수를 표방한 두 사람은 최근 당 경선 규칙이 탄핵에 찬성한 인사들에게 불리하게 설계되고, 보수 유권자의 지지 역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과 한덕수 국무총리 등 윤석열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에게 몰리자 낙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폐해진 보수 진영을 ‘배신자론’이 휩쓸고 있다. 정치 경력이 으리으리한 유력 주자끼리 “국회의원 몇 명이 배신해 대통령이 탄핵됐다”(김문수 전 장관) “배신자는 인간 말종, 꺼져라”(홍준표 전 대구시장) 하는 공격과 “헌법의 배신자들은 필패”(안철수 의원) “이재명에게 지는 게 국민에 대한 배신”(한동훈 전 대표) 같은 역공이 오간다.
익숙한 장면이다. 10년 전 보수 정당에서 ‘진박(眞朴) 감별법’과 ‘배신자 심판론’이 나온 지 1년여 만에 국정 농단에 따른 탄핵을 맞더니, 지난해 ‘배신자 논쟁’이 불붙은 지 반 년 만에 계엄 사태와 탄핵이 되풀이됐다.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 배신(背信)이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게 보수 진영의 가장 치명적인 주홍글씨가 됐을까. 그리고 어떻게 보수를 흔들고 쪼개왔을까.
10년째 돌고 도는 배신자론
2015년 6월 25일. 여의도 안팎 많은 사람이 잊지 못한다는 날짜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여당 원내대표 유승민을 겨냥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고 말했다. ‘대통령 덕으로 큰 주제’에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비판했다는 이유. 따분한 당정(黨政) 갈등이 화제의 드라마가 됐다. 2016년 김무성 대표도 친박 핵심과 공천 갈등 끝에 물러나고 대통령 친정 체제가 구축됐다.
2022년 7월 26일. 취임 두 달 된 윤석열 대통령이 여당 대표 이준석을 “내부 총질이나 하는 당대표”라며 친윤 결속을 독려한 문자가 공개됐다.
2024년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선 아예 ‘배신’ 여부가 당 대표를 뽑는 기준이 됐다. 채 상병 특검과 김건희 여사 사과를 요구한 한동훈 후보를 향해 “대통령의 황태자가 배신의 정치를 한다”는 비난이 비등했다. 심판론을 꺼낸 나경원·원희룡 후보 역시 한때 배신자로 찍혀 고초를 겪은 이들이다.
‘배신의 아이콘’이 다채롭게 진화하는 동안, ‘정권을 뺏겨도 주군을 배신하지 않은 사람은 살길이 열린다’는 전설도 퍼졌다.
지난 연말 윤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5선(選) 중진 윤상현 의원은 “박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해서 욕을 많이 먹었지만, 1년 뒤엔 ‘윤상현 의리 있어’ 하더라.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다 찍어주더라”고 했다. 새해 벽두 여당 의원 수십 명이 용산 대통령 관저 앞에 달려가 체포를 막았다.
자유한국당 대표 시절 파면된 박 전 대통령을 출당시켰다가 “배신자 네가 나가라”는 욕을 먹었던 홍준표 전 시장은 배신자 박멸 전도사가 됐다.
“TK(보수의 심장 대구·경북)에선 살인자는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대통령 등에 칼을 꽂고” “한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 “배신자 프레임에 갇히면 영원히 헤어날 길 없다” “탄핵에 찬성한 배신자는 모두 제명해야” 같은 말을 쏟아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이 말로 대통령이 됐던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된 직후 이철우 경북지사를 만나 말했다고 한다. “사람 쓸 때 가장 중요시할 것은 충성심이다.”
보수가 배신에 치를 떠는 이유
우리는 예부터 배신과 하극상을 혐오했다.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한 조선 시대엔 백성이나 하급 관리가 수령을 고소했다간 되레 곤장을 맞는 부민고소금지법이 있었다. 많은 역대 대통령이 유교적 충효 사상을 통치 원리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AI 시대.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정치 이념을 바꾼 것도 아닌데 의견이 다르다고 배신이라니?
보수 정당 동향에 정통한 인사 A는 설명했다. “한국 사회에서 내부 고발자가 잘된 경우 봤느냐. 아무리 민심이란 명분을 내세워도 배신자 낙인은 극복하기 어렵다. ‘중도’란 말은 그럴 듯하지만 권력의 세계에선 공허한 것이다. 그건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다. 개딸과 이재명을 보라.”
그럼 TK가 배신자를 살인자보다 미워한다는 건 사실인가? “(정치적으로) 죽은 대통령을 더 짓밟지 말라는 거다. 정통 보수가 가진 ‘염치’와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고 할 수 있겠다.”
민주당에 오래 몸담은 B는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후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분당과 대북 송금 특검 등 역대급 배신을 당하고도 놔뒀다. 진보에서 최대 배신은 ‘적과 타협해 패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에선 경쟁력 있는 인물도 배신자로 찍어 만신창이로 만든다. 자기들끼리 무슨 배신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던데.”
보수가 배신을 싫어하는 현상은 학술적으로 검증됐다. 도덕심리학의 세계적 석학인 조너선 하이트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는 2011년 미국인 13만명을 조사해 그들이 삶의 준거로 삼는 윤리, 그리고 그것에 상반되는 혐오하는 가치로 나눈 여섯 가지 도덕 기반을 도출했다. 바로 ‘배려와 위해’ ‘공정과 부정’ ‘충성과 배신’ ‘권위와 전복’ ‘고귀함과 추함’ ‘자유와 압제’였다.
연구 결과 진보는 배려·공정·자유 세 가지 기반만 고려하는 반면, 보수는 도덕 기반 여섯 가지가 고르게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꿔 말하면 보수에겐 ‘부도덕’을 판단하는 기준도 많다는 얘기다.
이 중 ‘충성/배신’ 기반은 집단·국가에 대한 긍지와 애국심, 희생을 신성시하는 감정, 그리고 그것을 위협하고 도전하는 배신자에 대한 격분의 감정을 형성한다. 진보엔 없다시피 한 개념.
반면 보수 성향이 강할수록 충성과 권위·고귀함을 최상위 가치로 여기는데, 온건 보수에선 배려·공정이 충성·고귀함을 앞선다. 보수의 분열은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도덕성을 볼모로 한 자해극”
언어인지학자 조지 레이코프 UC버클리대 교수도 말했다. “보수엔 ‘엄격한 아버지 도덕성’이 매우 중요한 윤리 프레임이다. 권위에 도전해 질서를 오염시키는 구성원은 처벌하고 싶어 한다. 그 처벌의 감정이 정책적 판단이나 물질적 사익을 앞서기도 한다.”
보수 시민의 이토록 깊숙한 ‘도덕 본능’은 정치적으로 악용되기 쉽다.
우리 대통령제 특성상 대통령과 여당은 멀어지게 마련. 그런데 유독 보수 대통령 주변에선 당정 간 정책·노선의 이견을 ‘배신’이라는 감정적 언어로 바꿔 선동하는 경향이 짙다.
그 ‘배신자’들이 아무리 “배신자 딱지는 옳은 길로 간 대가”(유승민) “배신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국민”(한동훈) “배신의 정치 저주를 풀고 보수의 스펙트럼을 넓혀달라”(이준석)고 호소해도, 보수층 상당수는 도덕적 손절을 끝낸 상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보스를 배신하면 안 된다는 건 조폭의 의리”라며 “공인의 윤리는 국민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사적 원한이 정치 철학이 돼선 희망이 없다”고 했다.
박성민 정치 컨설팅 민 대표는 “탄핵은 보수가 분열된 결과”라고 했다. 두 번 다 보수 정당이 배신자론으로 분열된 상태여서 대통령의 오판과 독주도, 국회의 탄핵 표결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관계자 C는 “보수의 파이가 작아질수록 확실한 줄을 잡으려는 욕구, 경쟁자를 쳐내려는 욕구가 커지는 것 같다”며 “그것이 파이를 더 잘게 쪼갤 것”이라고 말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변화와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신자론으로 공포 정치를 하면 ‘공포형·생존형 보수’만 남을 것”이라고 했다.
최영준 연세대 교수도 같은 지적을 했다. “탄핵 이후 대한민국 보수의 운명은 ‘배신자론’에 달렸다. 배신자론이 다시 주류 담론화된다면 그들의 확장성은 영남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뻐할 이들은 이재명과 더불어민주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