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포근해지자 내가 사는 보령의 오래된 공동 주택 마당에서 어르신들의 공동 노동이 시작되었다. 볕이 좋은 어느 날 높게 쌓인 나물을 다듬고 계셔서 “아, 고들빼기네요” 하고 아는 체하며 인사를 드렸다. “아니 서울 사람이 별걸 다 아네” 하시며 나물 이름을 아는 나를 기특해하셨다. 나는 “고들빼기김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라고 답했다. 성격이 쾌활하고 통이 큰 103호 어르신께서 김치를 담그면 나눠 주시겠다고 하셨다. 집 고치는 현장에 가느라 나는 이 말을 흘려들었다.
지난해 7월 보령으로 이사 와 정착할 집을 샀고 지금은 집 고치기가 한창이다. 구옥을 리모델링만 할 생각이었으나 구매한 집이 너무 좁아 도저히 남편의 작업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계획을 대폭 수정하여 증축을 하는 중이다. 증축을 하려니 인허가 등 다양한 문제가 따라왔고 공사 기간도 길어졌다. 시공팀을 잘 만나 공사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대문이 무너질 수 있어 골목에 도시가스 배관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웃, 자신이 쌓은 옹벽을 우리에게 철거하라는 이웃 등 상식과는 거리가 먼 예상치 못한 민원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마음이 심란하니 먹는 것에도 신경이 덜 쓰였고 장날 봄나물 구경 한번 못 하고 지내던 차였다. 냉이와 바지락을 넣은 밥을 지어 먹고 쌉쌀한 머위나물과 향긋하고 고소한 엄나무순 나물을 먹어야 봄이라고 느끼는 나다. 여유롭게 살고 싶어 지방에 자리를 잡았는데 집 짓느라 제철 음식도 챙겨 먹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우울감이 확 밀려왔다.
3~4월 우리 집 밥상은 그야말로 초록의 향연이다. 춘설이 날리고 바람이 차가워도 시장에 냉이와 달래가 나오기 시작하면 봄이 내 앞에 도착한 듯 반갑다. 명이, 쑥, 방풍, 머위, 씀바귀, 눈개승마, 두릅을 맛의 특성에 따라 간장, 소금, 된장으로 무치거나 살짝 데쳐 먹는다. 봄의 호사다. 그런데 마음이 어수선하니 힘들 것 없는 이 일을 내가 잊었다.
보령을 대표하는 문인 이문구는 ‘관촌수필’에서 “고향 어귀의 두릅 한 그루는 해마다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손에 가시가 박히는 것도 모르고 한 움큼 꺾어 올 때면, 내 속에도 봄이 올라왔다”고 했다. 이 두릅을 꺾기만 했을까? 분명 살짝 데쳐 오래 씹으며 봄의 맛을 만끽하고 봄의 맛으로 기억해 두었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도 “봄이 오면 어머니는 늘 냉이를 캐러 나가셨다. 냉잇국의 향은 집안 구석구석을 적셨고, 우리는 비로소 겨울을 견뎌낸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이처럼 봄나물에 유독 마음이 가는 것은 새롭게 움튼 자연과 인간의 첫 번째 접촉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고요한 침묵을 깨고, 인간은 땅을 살피고 풀의 기운을 만지며 봄을 확인한다. 이는 농경 사회 초기부터 전해져 내려온 생존의 기억이자 기쁨의 감각이다. 나물 캐기는 단순한 식재료 수확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숨 쉬는 리듬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 회복의 맛은 쓰다. 봄나물의 특징 중 하나는 쌉싸름한 맛이다. 겨울을 견딘 뿌리의 성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 씁쓸함을 해독의 미덕으로 여기며 고난을 겪은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생의 기미’로 받아들였다.
산에서, 들에서 나물을 캐는 일은 함께 하는 노동이었고, 캐 온 나물을 나누는 것은 관계의 회복이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건네는 한 줌의 나물에는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마음이 담겼다. 그러므로 나물은 계절의 음식이자 기억의 언어라고 한다. 봄나물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계절과 생명, 기억과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존재다.
내친김에 봄나물을 맛있게 요리하는 간단한 방법을 소개한다. 끓는 물에 아주 빠르게 데치고 나물을 무칠 때 습관처럼 넣는 마늘만 빼도 봄나물의 향기는 배가된다. 참기름 대신 들기름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조미료 대신 간장이나 소금, 때론 된장만으로 무치는 것이 좋다.
다음 날 103호 어르신께서 외출하려는 우리 부부를 보시더니 “혜자씨~” 하며 나를 부르셨다. 고들빼기김치를 가져다 먹으라 하셨다. 거절하지 않았다. 나눠 주신 고들빼기김치를 김치냉장고에 넣으면서 나는 기분이 날 듯 좋았다. 사람으로 상한 마음은 사람이 치유한다. 그 치유의 중심엔 마음이 담긴 음식이 있다. 내년 봄의 나에게 미리 일러둔다. 집 고치느라 심란했던 마음을 치유해 준 올해의 고들빼기김치 맛을 꼭 다시 기억해 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