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중년 사내 김찬우는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참 착실히 산 사람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적 없고, 불법을 범한 일도 없었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이 그의 조상님을 탓할 지경이었다. 저렇게 착하게 사는데 조상님은 뭐 하냐고.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왔다. 인자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딱히 뭘 주거나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상님 꿈이니 뭔가 좋은 일이 있으려나 싶었던 그는 로또를 5000원어치 샀다.

그러나 좋은 일은 개뿔, 다음 날 그는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정류장에서. 인파가 북적이는 틈을 타 누군가 그의 옆을 쓱 스쳐 지나갔고, 집에 도착한 뒤에야 그는 뒷주머니가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인생이 그러면 그렇지.” 그로서는 조상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며칠 뒤 저녁 퇴근길, 낯선 남자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구걸을 하려나’ 싶을 정도의 남루한 행색이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얼굴은 반쪽이 돼 있고,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된 채.

“무슨 일…?” 찬우가 경계하며 묻자, 남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버스 정류장에서 지갑 잃어버리셨죠?” “아, 예.” “실은 그거 제가 훔친 겁니다.” “예?” 찬우는 자기가 소매치기라고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당황했다. 더 당황스러운 건 사내가 불쑥 내민 그의 지갑이었다. “돌려드리려고….” 찬우는 놀란 눈으로 지갑을 받았다. “내 지갑 맞는데, 아니?” “죄송합니다.” “당신 소매치기야? 안에 있던 돈은!” 찬우는 얼른 지갑 안을 확인해 봤는데, 남자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돈이고 뭐고 문제가 아닙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무슨?” “그 안에 로또요. 그거 1등입니다. 1등 당첨됐다고요. 그래서 그거 돌려드리러 온 겁니다.” 찬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1등? 지갑 안에 있던 로또가? 아니 말도 안 되지 않는가? “진짜입니다. 번호 확인해 보세요.” 남자의 표정은 진실했다. 찬우는 혼란스러웠다. 진짜 1등 당첨된 복권이라면 그걸 왜 돌려준단 말인가? 소매치기가 갑자기 미친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으로 당첨 확인을 해보던 찬우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로 당첨이었다.

“아 아니? 아니 이게? 아니?” 찬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믿기지 않는 얼굴로 로또와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근본적인 물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러면 이제 용서해 주시는 거죠?” 한숨도 잠을 못 잔 듯한 남자의 다음 말은 찬우가 상상도 못 했던 것이었다. “매일 꿈에서 노인네가 내 목을 조릅니다. 당장 그걸 돌려주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돈이 목숨보다 중하진 않으니….” 순간, 찬우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할아버지구나! 할아버지가 불쌍한 손자를 위해 나서 주신 거였구나!

“아,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당신 꿈에…!” “그럼 제발 좀 전해주십시오. 저는 돌려드렸으니까 살려달라고요. 더는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요.” 새파랗게 질린 남자는 애원했고, 찬우는 벅찬 감동에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그제야 남자는 겨우 짐을 던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뒤, 아쉬운 듯 지갑을 바라보았다. “부럽습니다. 그런 조상님도 계시고…. 우리 조상님은 뭘 하시는지….”

같은 시각 저승. 갓 쓰고 도포 입은 노인 하나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헉헉거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옆에 지나가던 다른 영혼이 말을 걸었다. “아이고, 박씨 어르신. 뭘 그리 핏대를 세우시오?” 박씨 노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내 이놈의 후손 놈 때문에 내가 저승에서도 편히 쉴 수가 있어야지! 몇 번이나 내려갔다 오느라 죽는 줄 알았네.” “또 무슨 사고라도 쳤소?” “사고 정도가 아니야!” 성질이 나 가슴이 터질 것 같다며 갓을 바닥에 내던진 노인은 외쳤다. “아니 글쎄, 이번엔 남의 1등짜리 복권을 훔쳤어!”

옆 영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1등이요? 허허, 그거 참. 그래서 박씨 어르신께서 직접 행차하신 게로군요? 저승의 법도가 후손이 저지른 죄를 조상들이 감당하는 것이니. 어디, 가서 호통이라도 치셨소?” “저 꼴통, 어휴! 평소 그놈이 치던 좀도둑질이나 에잉, 후손 잘못 둔 우리 팔자려니 하고 고생 좀 하고 말았는데…. 로또 1등은 차원이 다르잖소! 그거 훔친 죄를 우리가 어떻게 감당해? 조상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님까지 죄다 끌려와서 고생할 뻔했네! 저 망할 놈의 자식!”

노인은 분이 안 풀리는 듯 자기 가슴팍을 쾅쾅 쳤다. “그래서 그냥 냅다 목을 졸라버렸지! 당장 안 돌려놓으면 다 죽는 거라고! 에휴, 겨우 돌려놓게 했네.” 노인은 퀭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봤다. 그 시선 끝에는, 방금 지갑을 돌려주고 후다닥 도망치는 자기 손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조상 복 없다고 한탄하던 소매치기의 뒷모습 말이다. “에휴, 내 팔자야. 후손 복은 지지리도 없구먼….”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