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웨슬리여자고등학교와 대만 문화고등학교 학생 104명이 지난 10일 서울 구로구의 한 장소를 찾았다. 이들은 치킨과 핫도그, 망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흥겨운 음악 소리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고 춤을 췄다. 눈앞에 펼쳐지는 짜릿한 장면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 학생들의 한국 관광 목적지는 바로 야구장이었다.
K야구장이 ‘종합 오락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아슬아슬한 스포츠 경기를 보며 목이 쉬어라 소리치고 춤추며 스트레스를 풀고,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들의 음식과 시원한 맥주까지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다. 한국 야구장은 스포츠와 오락, 미식이 합쳐진 매혹적인 공간으로 해외 관광객의 주목을 받는다.
지난해 국내 프로야구는 처음으로 ‘10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2025 한국 프로야구 KBO리그는 지난 22일 역대 최소 경기인 118경기 만에 200만 관중을 돌파했다. 종전 기록(2012년 126경기)보다 8경기나 빨랐다. 매진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관광공사는 ‘한국 야구장 체험’ 관광 상품 모객 목표를 300명에서 600명으로 2배 확대했다.
여기서 궁금한 점 하나.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에 가입된 국가만 138국, 한국 야구는 세계 랭킹 6위(2024년 기준)에 그친다. 한국만 야구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1위)·대만(2위)처럼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닌데 외신은 물론, 관광객들까지 한국 야구장에 주목한다. K야구장은 어떻게 세계가 주목하는 핫플레이스가 됐을까?
◇야구장 필수품 된 먹을거리
지난 19일 정오 서울 잠실새내 새마을시장은 야구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 필수품’을 챙기려는 고객들로 북적였다. 잠실야구장에서 오후 2시부터 기아타이거즈와 두산베어스의 경기가 예정된 날이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우천 취소를 걱정할 법한 상황에서도 야구 팬들이 시장을 찾은 건 야구 관람 필수품인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깻잎 닭강정 집은 아예 간판 밑에 10개 야구단의 로고를 걸어 놓았고, 새우만두 가게에 줄 선 사람의 90%는 야구 유니폼 차림이었다. 또 다른 치킨집은 아예 ‘야구장 세트’라는 이름으로 닭꼬치와 염통꼬치 세트를 팔고 있었다. 야구 유니폼을 입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한 커플은 “양이 좀 많나?” 걱정하면서도 만두와 닭강정을 산 뒤에야 야구장으로 향했다.
한국 야구장의 대표 상품은 스포츠 경기도, 좋은 시설도 아닌 ‘먹을거리’다. 한국 야구장 관광을 위해 한국에 온 대만 고등학생들도 닭꼬치와 소떡소떡, 핫도그, 닭강정, 오뎅, 크림새우와 망고를 올린 요거트 아이스크림까지 야무지게 시켜 놓고 먹방을 펼쳤다. 소셜미디어(SNS)에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료수’로 소개된 밀키스를 사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은 음식도 야구장에서는 더 맛있게 느껴진다고 경험자들은 증언한다. 야구 경기 시간에 주문이 몰리는 특성상 미리 조리한 음식을 포장해 놓을 수밖에 없는데, 경기의 흥분과 단체 응원의 흥겨움은 살짝 식은 음식과 다소 눅눅해진 튀김조차 맛을 배가시킨다. 작년 3월 미국 프로야구(MLB) 서울시리즈 개막전 생중계를 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 NHK스포츠 해설자들이 헤드셋을 쓴 채 고척돔 대표 메뉴로 꼽히는 크림 새우와 떡볶이를 먹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진화하는 베이스볼 식도락
치맥(치킨+맥주)으로 대표 되던 야구장 먹을거리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한국 대표 음식을 한자리에서 먹고 싶으면 야구장에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 요즘 야구 팬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먹을거리는 ‘육회’다. 두산 팬들 사이에서 플라스틱 컵에 육회 재료를 섞어 먹는 게 유행하자 잠실야구장 근처 가게들이 아예 야구장에서 먹기 좋게 컵에 담은 육회를 정식 메뉴로 내놓기 시작했다.
야구장에서 식도락을 즐기는 건 지방 구단 팬들도 똑같다. 구장별로 다양한 대표 먹을거리를 판매한다.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는 지역 명물인 납작만두, 매콤한 콩나물을 곁들인 만두를 판다.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의 인기 메뉴는 대전역에서 한 그릇씩 먹고 기차 타던 추억의 가락국수. 충남 예산 출신인 요리 연구가 백종원의 닭발·우동·불고기 브랜드도 입점시켰다. 통닭 거리가 있는 수원의 야구장 KT위즈파크에서는 진미통닭을 바삭하게 튀겨 판다.
빵에 소시지 하나 끼워 소스 뿌린 핫도그 먹던 미국 야구 팬, 다코야키와 도시락 먹던 일본 야구 팬과 햄버거와 치킨, 피자 먹던 대만 야구 팬이 눈을 크게 뜰 법하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작년에 “떡볶이, 족발, 맥주를 좌석에 반입해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기를 직접 굽는 ‘바비큐존’을 둔 구장도 있다”며 구장별 대표 메뉴를 소개했다.
야구장 먹을거리의 배송 방식도 진화했다. 야구장과 거리가 먼 시장을 찾아 음식을 구매하고,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점수 내는 걸 못 볼까 조마조마한 야구 팬들을 위한 ‘픽업 서비스’가 등장한 것이다. 배달 애플리케이션 요기요는 지난달 22일부터 인천 미추홀구 SSG랜더스필드 야구장 안에 픽업존 운영을 시작했다. 앱에서 야구장 안에 있는 매점과 식당의 메뉴나 외부 음식을 배달시킨 뒤 포장·배달된 음식을 픽업존에서 수령하면 끝. “내가 잠깐 음식 사러 갔을 때 꼭 점수가 난다”는 징크스 있는 팬이나 “누가 음식 사러 다녀올 거냐” “나 없는 동안 홈런 치면 어떡하냐”며 갈등을 겪던 팬들에겐 희소식이다. 잠실야구장도 같은 날부터 야구장 전용 스마트오더 앱 ‘배달타자’ 서비스를 시작했다.
◇“날려라 날려” “삐끼삐끼”
배를 든든히 채웠다면 신명 나게 놀아야 한다. 한국 야구장은 노래방 겸 무도회장 역할도 하는 종합 오락장. 야구 팬들은 선수별 고유 응원가를 창작하는 데 도사다. 유명한 노래에 선수의 이름과 응원을 담은 가사를 얹고, 유튜브나 앱으로 야구 응원가를 예습까지 하는 학구파도 많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람은 아이스크림 장수”라고 우스갯소리하는 외국 팬들 눈에는 볼수록 신기한 장면일 것이다.
KBO리그 생활을 한 외국인 선수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도 이 응원 문화다. 코로나로 무관중 경기를 하던 2020년 당시 두산 외국인 타자 호세 페르난데스는 “첫 타석에서 들은 팬들의 소름 돋는 응원을 잊지 못한다”며 “KBO리그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응원 소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한국 야구장에서 들리던 응원가가 미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미국 밀워키 구단은 NC다이노스 소속이던 에릭 테임즈 선수의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동료 선수들의 영상을 공개한 바 있다.
‘삐끼삐끼춤’도 한국 응원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기아 타이거즈의 아웃송(수비 시 아웃카운트가 올라갈 때 나오는 노래)에 맞춰 엄지손가락을 편 채 팔을 흔들며 춤추는 치어리더의 모습이 공개되면서 지난해 SNS를 강타했다. 삐끼삐끼춤의 주인공인 이주은 치어리더는 대만 프로야구 푸본 엔젤스와 전속 계약하면서 LG 트윈스에도 영입돼 양국에서 활동을 병행할 예정이다. 앞서 2023년에는 이다혜 치어리더가 국내 치어리더 최초로 대만에 진출했다.
야구장 쇼핑도 요즘 팬들의 새로운 취미 중 하나다. 좋아하는 선수 이름을 새긴 유니폼을 챙겨 입고, 기념품을 싹쓸이하며 소장의 기쁨을 누린다. 좋아하는 선수의 사진을 담은 카드를 제작해 주변 팬들과 나누고, 응원 도구 없는 팬에게 기꺼이 물품을 나눠주는 정겨운 모습도 K야구장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SPC삼립이 구단별 선수 스티커(띠부씰)가 담긴 크보빵을 만들었는데 3일 만에 100만봉이 판매됐다. 앞서 띠부씰 열풍을 불러일으킨 포켓몬빵의 판매 기록을 빠르게 넘어섰다.
웅진식품 역시 ‘하늘보리 KBO 에디션’을 내놓았다.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음료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롯데자이언츠만 협업 상품 제작에서 제외되며 원망이 커지자 지난 22일 롯데 계열사인 편의점 세븐일레븐이 ‘거인의 함성, 마!’라는 이름의 빵과 과자 등을 내놓으며 성난 팬심을 진정시키고 있다. 과자 하나, 빵 하나도 팬심을 담아 사 먹는 야구 팬들의 소외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 야구장 응원 문화를 수차례 조명하며 “한국의 야구 경기는 감각적인 과부하(sensory overload)가 이어진다” “한국 야구장은 ‘록 콘서트장’ 같다”고 썼다. 이번 주말에도 입과 눈, 몸이 즐거운 야구장에서 기쁨의 과부하를 만끽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