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감독이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세계 평화의 문 앞에서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있다. “마라톤은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운동입니다. 인간이니까 뛰어야죠!”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감독이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세계 평화의 문 앞에서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있다. “마라톤은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운동입니다. 인간이니까 뛰어야죠!”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봄이니 한번 뛰어볼까. 달리기 인구가 1000만이라는데. 내일(27일) 조선일보 주최 2025 서울하프마라톤이 열리고, 주말마다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하지만 평생 달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창 시절 100m를 22초에 주파(!)했고, ‘나와의 싸움’은 전혀 취향이 아니다.

큰 변고가 없다면 우리는 누구나 걷고 뛴다. 하지만 운동으로서 달리기는 선뜻 용기가 안 난다. 어떻게 뛰어야 할까. 러닝 초보 기자가 1992년 스페인 바로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55)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에게 배워봤다. 핵심은 “걷듯이 뛰라”는 것.

◇“인간이니까 뛰는 겁니다”

기본 동작부터. 우선 발이 팔자가 돼서는 안 된다. 앞에 긴 직선이 뻗어져 있다고 치자. 이 직선을 따라 무릎이 스치듯이 양발을 일자로 놓아가며 뛴다. 양반들은 아마도 힘들 것이다. 초보라면 보폭을 내 발 하나 정도 크기로 작게 둔다.

기초강습1. 발이 팔자가 돼서는 안된다. 무릎이 스치듯 양발을 일자로 놓아가며 뛴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그다음, 착지할 때 발의 어디로 디디느냐. ‘영조형(황 감독의 별명이자 유튜브 채널명)’이 쏘아 올린 작은 공. 미드풋과 카본화 논란이 여기서 나온다. 신발 중창에 ‘카본 플레이트(탄소 섬유)’가 든 특수 러닝화, 카본화의 등장으로 세계 마라토너들의 기록이 단축되고 있다. 뒤꿈치에 스프링을 장착하고 뛴다고 이해하면 쉽다. 카본화를 신으면 미드풋(발바닥 전체 면으로 딛는 것)으로 착지하게 된다.

기초강습2. 초보라면 발 뒤꿈치부터 딛는 방식으로 뛰어야 한다. 걷는 것처럼.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문제는 이 카본화가 근력이 받쳐주지 않는 초보자나 과체중인 사람들에겐 오히려 부상을 유발하는 ‘과한 장비’라는 것. 황 감독은 “나도 못 신는다. 돈 줘도 안 신는다”며 “최근 이순신 백의종군길 마라톤대회에서도 카본화 신은 2명이 발목 부상으로 앰뷸런스를 탔다”고 했다. 초보자는 쿠션감 있는 운동화를 신고, ‘리어풋(힐풋·뒤꿈치부터 딛는 방식)’ 방식으로 뛰어야 한다. 걷는 것처럼.

팔은 과하게 흔들지 말자. “배꼽 앞에서 삼각형을 만들어 리듬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흔든다. 단거리는 팔을 크게 치지만, 오랫동안 뛰려면 에너지 소모를 줄여야 한다.” 이상으로 기초 강의는 끝. 이제 뛰어보자.

기초강습3. 팔은 배꼽 앞에서 삼각형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흔든다. 무엇이든 과하지 않게, 억지스럽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황 감독이 뛸 테니 기자에게 옆에서 걸으라고 했다. 기자가 일상보다 아주 조금 빨리 걷는 것과 황 감독의 뛰는 속도가 같았다. 반대로 황 감독이 걸을 테니 기자에게 “천천히 뛰어보라”고 했다. 걷듯이 천.천.히.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기자는 뛰쳐나갔다. 본디 뛰는 것은 속도를 내는 것이란 강박이 있었던 것(100m 22초 주제에).

걷는 정도 속도로 뛰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게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가르침이었다. “걷는 건지 뛰는 건지, 고작 이 정도 속도로 이렇게 뛰는 것도 뛰는 거예요. 어려운 게 아니에요. 마라톤은 가장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운동입니다. 인간이니까 뛰어야 하는 거고요.” 올림픽 육상 장거리 3관왕으로 ‘인간 기관차’라 불린 에밀 자토페크도 말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42.195 도전하는 금메달리스트

황 감독은 올해 연말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목표로 다시 뛰는 중이다. 3㎞부터 시작해 지난 13일 ‘삼척 황영조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친구 이봉주 선수와 함께 5㎞를 뛰었다.

-왜 다시 뛰십니까.

“죽기 전에 한 번 더 뛰어보려고요. 달리면 살고 누우면 죽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저도 60을 향해 가고 있어요. 꺾였잖아요. 이러다 못 달리게 되면 죽는 거 아니에요? 건강하고 튼튼하게 100세 시대를 맞이해야죠.”

-금메달리스트도 보통 사람과 같은 이유로 뛰는군요.

“제일 하고 싶지 않은 게 뛰는 거였어요. 그동안 아예 잊고 살았는데, 다시 뛴다고 해도 현역 복귀하는 건 아니니까요. 35㎞를 넘어 40㎞를 향해 뛸 때 그 심장의 고통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심장의 고통은 어떤 느낌입니까.

“선수 시절에 분당 심박수를 215까지 올렸어요. 안정 시 심박수는 당시 37~38 정도였는데, 그 격차가 얼마나 큽니까. 몸에 강한 부하를 걸고 자극을 주며 고통스럽게 했지요.”

-달콤한 고통 같은 건가요.

“아뇨. 난 뛰는 게 너무 싫었어요. 제일 힘든 게 뛰는 거였지요. 매일 훈련 갈 때마다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힘든 걸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이걸 평생 계속할 수는 없다, 빨리 그만두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고 빨리 목표를 이뤄서 은퇴한 겁니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으로 결승점에 들어오는 황영조 선수

황 감독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13분 23초로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민국 최초, 아시아에서는 매우 드문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이다. 일장기를 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가 지켜보고 있어 더 의미가 컸다. 그렇게 스물두 살에 국가적 영웅이 된 황 감독은 불과 4년 뒤 은퇴했다.

-전성기가 짧았다고 합니다.

“더 뛸 수 있는데 왜 그만두냐고 많은 분이 안타까워했어요. 금메달 땄는데 뭘 더 하라는 건가요. ‘고시 패스’ 했잖아요. 얼마나 고통스럽게 나 자신을 버리고 오직 한 가지에 매달려 왔는데요. 저는 시합 준비할 때 항상 이게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힘드니까 또 뛴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제가 목표한 거 300% 이뤘고요. 할 거 다 해서 은퇴한 겁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지만 인생의 황금기는 당연히 금메달을 걸었을 때였다고 했다. “올림픽의 꽃은 마라톤이에요. ‘평화’를 말하는 올림픽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종목이고요. 돌아보면 불꽃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의 암흑기로는 훈련할 때가 아닌 궁핍한 어린 시절을 꼽았다. 지금도 ‘우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기념품 우산은 꼭 챙긴다고. 어릴 적 멀쩡한 우산을 써본 적이 없어서.

"이젠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된 현실입니다. 치욕적이죠. 힘든 걸 안 하려고 해요. 육상 중에서도 오래 뛰어야 하는 마라톤은 싫다고 합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아마추어가 선수처럼 뛴다”

‘헝그리 정신’의 산증인이라서일까. 한국 육상계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졌다. 그야말로 러닝 열풍이지만 마라톤 국가대표 수준은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는 지적. 지난해 파리 올림픽엔 한 명도 출전하지 못했다.

-부진의 이유가 뭘까요.

“이젠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된 현실입니다. 치욕적이죠. 힘든 걸 안 하려고 해요. 육상 중에서도 오래 뛰어야 하는 마라톤은 싫다고 합니다. 저희 때는 밑창 1㎝짜리 신발을 신고 뛰었어요. ‘장비 도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카본화 같은 기능성 신발이 나오죠. 훈련이나 식습관, 여러 환경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는데 기록이 안 나와요.”

-육상계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선수들 욕하고 다닌다고 하는데, 저는 현실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 세계 비공식 기록이 1시간 59분까지 갔는데, 요즘 선수들은 손기정 선수보다 기록이 안 나오니 이건 심각한 거죠.”

-아마추어들 수준은 올라가고요.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 일본 공무원인 동호인 마라토너가 2시간 15분대 기록으로 우승한 적이 있어요. 우리도 그런 기적을 바라야 하는 상황에 왔다고 봅니다. 요즘 우리 러닝 문화를 보면 아마추어가 선수처럼 뛰고, 선수들이 아마추어처럼 해요. 실제로 동호인 중에 선수로 발탁할 만한 사람 없는지 유심히 보고 다닙니다.”

황 감독은 요즘 ‘러닝 열풍’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유튜브도 시작했다. 자신의 풀코스 도전기도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엘리트 선수 후배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지적을 쏟아냈지만, ‘아마추어 친구들’에게는 ‘펀 런(fun run)’이 더 중요하다고 달랬다.

-뭐라고 조언하십니까.

“저도 ‘완주’를 목표로 하니까 풀코스에 나서는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요즘 러닝하는 사람들 보면 선수처럼 자신을 몰아붙이더라고요. 일주일에 서너 번, 한 5㎞ 정도 뛰고 컨디션 좋으면 10㎞ 뛰고 하면 되는데 매일 20~30㎞씩 뛰어요. 토~일요일 연달아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 나가질 않나. 제가 선수 때도 대회는 봄·가을에 한 번씩만 나갔어요.”

-일종의 노파심이네요.

“저는 골프나 축구, 테니스 스포츠는 전혀 안 합니다. 기본이 달리기고, 달리기만큼 좋은 운동이 없거든요. 이 좋은 운동 80대까지 잔잔히 계속하는 게 중요하죠. 뛰는 건 좋은데, 너무 과해요.”

황영조 감독은 올 연말을 목표로 다시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다. 서브3(풀코스를 3시간 내에 뛰는 것)를 달성하면 "꿈의 신발" 카본화를 신어보고 싶다고 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풀코스는 어떤 계획으로 준비하십니까.

“올해 여름 전지훈련 때 몸을 만들고 컨디션을 끌어올릴 계획입니다. 체중은 계속 줄이고 있고요. 국내 대회 말고 해외에 나가서, ‘첫 데뷔전’은 5시간 반쯤 걸려 뛰지 않을까요? 그다음에 5시간 20분, 5시간 이내로 뛰고. 왜 죽기 살기로 뛰어요. 내 몸 되는 대로 간다는 걸 내가 알려주는 거죠.”

이번 풀코스 도전이 두 번째 ‘데뷔전’.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계속 뛰겠다는 것이다. “달리기 시작하면 제가 서브3(풀코스를 3시간 내에 뛰는 것) 한 번 하겠죠. 그러면 카본화 한 번 신어봐야죠(웃음). 나도 한번 신어보고 싶어요. 나한테는 ‘꿈의 신발’이에요. 그날을 기대하면서 초보자의 심정으로 뛰고 있는 겁니다.”

[아무튼주말] 황영조 영상 _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