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만 하더라도 서울 강남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이 압구정 현대나 한양아파트 건너편 성동구 성수동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자동차 고칠 때나 방문하는 동네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성수동 일대엔 젊은이들이 북적이기 시작했고 현재는 외국인들도 찾는 글로벌 핫플레이스다. 디올이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한 것이 그 변화의 상징이다.
여기서 지난 연재(익선동의 변화)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2010년대 초반, 아무도 찾지 않던 자동차 공업소 밀집 지역, 한때 흥했으나 쇠퇴한 수제화 공장이 있던 이 동네가 어떻게 글로벌 트렌드를 이끄는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성수동과 익선동의 성공에 공유되는 키워드는 ‘차별적 경험’이다. 두 지역 모두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면서 새로운 감성과 창의성을 입힌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아파트 키즈인 젊은 세대에게 익선동의 한옥 지구나 공장과 창고가 밀집한 성수동은 매우 차별적인 장소였다. 그런데 성수동에는 익선동과 다른 특징이 있다. 강력한 업무 지구로의 성장이 핫플레이스보다 선행했다는 점이다.
2013년 두 젊은 기업가(루트임팩트와 임팩트스퀘어)가 필자의 서울대 연구실에 찾아왔다. 소셜 벤처들을 지원하는 임팩트 투자회사를 운영하는데, 본인 회사와 투자할 회사들이 모일 만한 장소를 물었다. 혹시 사회적 기업이나 소셜 벤처를 사회주의적이거나 비즈니스와 동떨어진 개념으로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여기서 읽기를 중단해도 좋다. 세계적 경영학자이자 전략의 대가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미 15년 전 ‘공유 가치 창출(Creating Shared Value)’ 논문에서 기업이 사회적 가치와 환경적 가치를 실현하며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만이 자본주의 기업이고 그러지 않는 기업은 자본주의적이지 않다는 편견은 버려라.
당시 나는 낙성대와 성수동을 추천했다. 낙성대는 국내 최고 대학과 인접해 있고 2호선을 따라 강남 접근성도 좋았다. 성수동은 준공업 지역으로 450%에 이르는 높은 용적률을 확보할 수 있고(인구밀도는 도시 성장의 힘이다), 성수대교만 건너면 강남 업무 지구와 연결됐다. 공업 지역 특유의 차별적 공간 경험이 가능하다는 점도 강점이었다.
그들은 성수동을 택했다. 갤러리아 포레 뒤편 서울숲 북쪽의 아담한 빌라 지구, 지금의 ‘서울숲 카페 거리’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전략적으로 다양한 소셜 벤처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성수동에 입주했다. 공유 주택 ‘디웰’을 시작으로 다양한 사회적 기업이 들어오자 생태계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조용한 시작이었지만, 업무와 소비가 결합된 복합 지구로 점차 진화했다. 성수동은 마이클 포터가 말한 ‘공유 가치 창출’의 한국 사례다.
공유 가치 창출의 대표 사례는 세계 최대 식품 회사 네슬레다. 네슬레는 1960년대 인도 모가(Moga) 지역에서 우유를 수매하면서 낙농 문제에 직면했다. 농가들은 극심한 빈곤 상태였고, 수의사와 냉장 유통망은 전무했으며, 위생 상태도 좋지 않았다. 네슬레는 젖소 사육법 교육, 사료 관리, 수의사 지원, 냉장 인프라 구축 등 지역사회 여건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유 품질이 높아지며 안정적 수급이 가능해졌고 해당 지역에 사료 업체, 운송업체, 장비 서비스 등 연관 산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네슬레는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소득과 삶의 질을 높이며 지역 경제의 핵심 주체가 됐다.
성수동도 상당히 인상적인 성장을 구가하며 이런 패턴을 경험하고 있다. 2010년대 초반 소셜 벤처에 투자하는 금융회사들이 들어오자, 투자를 받으려는 괜찮은 소셜 벤처와 사회적 기업들이 성수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연관된 다른 기업들도 입주했고, 젊은 종사자들이 몰리자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카페와 레스토랑, 옷가게들이 들어서며 핫플레이스가 된 것이다. 투자 생태계가 조성되면 파급 효과로 그 생태계가 더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젠 다른 영역의 거대 회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신사 같은 거대 패션 플랫폼과 SM 엔터테인먼트, 현대글로비스, 화장품 및 뷰티 회사들이 입주하면서 새로운 업무 지구 클러스터로 발전한 것이다.
핫플레이스는 몇몇 자본가가 콘텐츠를 심고 마케팅으로 포장해 단기적 유행을 만들며 성장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업무 지구, 특히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자생적인 클러스터 형성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다. 한 조직이 강남에서 성수동으로 사무실을 옮기는 일은 저렴한 임차료 때문이 아니라, 기능적 생태계와 상호작용의 가능성 때문이라야 한다. 성수동은 그러한 맥락을 충족시켰기에 진정한 클러스터가 될 수 있었다.
서울의 경쟁력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논의로 다시 돌아가자. 만약 쇠퇴한 공장들이 있고 거리에 사람이 없는 모습의 지역을 재생시키기 위에, 다 허물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야 했다면 현재의 성수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에 어떤 기능이 들어가야 하는지, 그 기능을 작동시키는 조직은 무엇인지, 이들을 입주시키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지 등을 고민하지 않은 채, 건물만 세우면 알아서 들어오겠지 하는 생각은 몽상에 불과하다.
성수동은 ‘보존과 개발의 균형’을 일구면서 지역이 변화했다. 일부 건물은 압도적 규모의 건물들로 재개발됐으나, 어떤 건물들은 과거의 창고와 공장 모습을 간직한 채 내부를 혁신적 공간으로 바꿨다. 이런 공간 변화는 새로운 유형의 소셜 벤처 생태계, 새로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과 역량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과거의 성수동은 부숴야 할 공간처럼 보였겠지만, 지금 성수동을 만든 젊은 창업가들과 그들의 네트워크는 도시의 미래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