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와 강풍이 지나간 자리엔 잿더미조차 성하지 않았다. 지난 14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한옥 건물 등이 있던 2만6400㎡(약 8000평) 규모의 부지는 희멀건 흙바닥을 드러낸 채 숯덩이만 굴러다녔다. 약 300평인 창고 건물 내부는 시커먼 숯가마 같았다. 고미술품 수장고였지만 1100여 점 중 형체가 남은 건 한 점도 없었다.
지난달 25일, 멀찍이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30분도 안 돼 이곳으로 불길이 덮쳤다. 150~200년 된 목가구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며 모든 것을 불살랐다. 6000만원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강화 반닫이’를 포함한 목가구와 목기(木器) 등 수십만~수천만 원짜리 소장품들이 하루아침에 ‘가장 비싼 재’가 되고 말았다.
안영환(68) 락고재문화재단 회장은 한참을 뒤적여 그을린 쇠경첩 몇 점만을 겨우 찾았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가 재 한 줌을 집어 들었다. “25년여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은 것들입니다. ‘한옥 박물관’을 세워 전시하려 했지요. 건립이 코앞이었는데….”
◇차라리 돈이 타버렸다면
안 회장은 서울 북촌에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락고재(樂古齋·옛것을 즐긴다)’를 지은 인물이다. 지난해에는 안동 하회마을에 5000평 규모 ‘락고재 하회 한옥 호텔’도 개장했다. “고미술품은 한옥에 있어야 비로소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철학 때문에 직접 수집한 진품 청자·백자나 서첩, 목가구 등을 객실에 두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투숙객이 박물관 안에서 자는 기분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고 했다.
수장고의 소장품은 그가 한옥 호텔을 처음 구상하던 1990년대 말부터 모은 것들이다. 하필 고미술품인 이유도 ‘한옥과의 연결성’ 때문. 그는 “목가구는 습하면 불어나고 건조하면 뒤틀려 관리가 어렵다”며 “대기 중 습기를 머금었다가 건조하면 내뿜는 한옥은 고가구와 가장 어울리는 환경”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락고재문화재단’을 만들고 한옥 박물관 건립을 본격화했다. 안동시와 부지 협의까지 마쳐가는데 사달이 났다. “고미술품에는 조상들의 손때와 숨결이 배어 있어요. 나 때문에 귀한 유산들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차라리 돈이 타버렸다면 나았을 텐데요.”
◇한옥 인재 양성소마저
흙바닥에 기왓장이 널려 있었다. “한옥 학교 건물에서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했다. 산불은 2011년 문을 연 ‘락고재 부설 한옥 학교’의 한옥 3채와 실습장·작업장까지 흔적만 남긴 채 앗아갔다. 대들보 등으로 쓰려고 말리던 직경 90㎝짜리 소나무와 참죽나무 등이 거북 등딱지처럼 겉이 쩍쩍 갈라져 나뒹굴었다.
지난 2월까지 목수 80여 명을 배출한 한옥 학교는 ‘한옥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원하는 전통 방식으로 한옥을 지어 줄 목수를 구하기 어려워 “직접 인재를 키우자”는 생각도 있었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 대목수(大木手)를 모셔도 모자랄 판에 ‘초짜’를 데리고 어떻게 한옥을 짓느냐는 것. 속도는 숙련자의 3분의 1 정도로 느리지만 오히려 기본에 충실하다는 강점이 있었다. 단 0.5㎜의 오차만 발생해도 다 뜯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지었단다. 락고재 하회의 한옥 22동은 모두 한옥 학교 졸업생 작품.
안 회장은 한옥 박물관을 발판 삼아 “한옥 학교 졸업생을 보내 실내 한옥을 무료로 지어줄 테니 한국관 전시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해외 박물관에 제안할 생각이었다. 한옥 안에 전시 형태로 고미술품을 두는 그의 한옥 호텔은 지금도 세계 박물관의 주목을 받는다. 올해 ‘이건희 컬렉션’을 준비하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아시안 아트 이사진과 큐레이터가 “정취와 멋을 참고하겠다”며 락고재 하회를 방문할 정도다.
◇코리안 트래디셔널 에어비앤비
어쩌다 한옥에 빠지게 된 걸까. 헐릴 뻔한 서울 마포의 낡은 한옥 한 채와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1991년 부친 권유로 부동산 개발업에 뛰어든다. 이듬해 “한옥을 헐고 현대식 주택을 지어 달라”는 의뢰를 받지만 “아름답고 아까워 ‘마포 황 부자’가 살았다던 그 한옥을 내가 빌렸다”고 했다. 덕지덕지 붙은 콘크리트 개조 흔적을 뜯어냈다. 목조 골격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방에 통유리를 붙여 한정식집을 열었다. ‘진사댁’이라고 이름 지어 대박이 났다.
한옥의 아름다움에 빠져 경주·안동의 고택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안 회장은 “처음에는 외적인 모습에 매료됐어요. 그런데 집주인에게 부탁해 직접 묵어보니 알겠더군요. 한옥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에서 경험하며 느낄 때 진정한 멋이 우러난다는 것을요.”
한옥을 수백 채 보며 깨달았다. “한옥은 ‘필 바이 하트(feel by heart)’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데 있었다. 외국인에게 정과 풍류, 자연과의 조화라는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 안동 하회마을 담연재·병산서원 등 전국의 고택과 계약을 맺고 1995년부터 5년간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시험 삼아 숙박업을 시작했다. ‘한옥에서 숙박한다’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요즘 말로 ‘코리안 트래디셔널 에어비앤비’에 외국인은 열광했다. ‘웰컴 드링크’로 전통차를 준비하고 저녁 자리에선 “풍류를 느끼시라”며 대금 공연을 했다. 사업은 적자였지만 안 회장은 “수업료를 지불하고 ‘이게 된다’는 확신을 얻은 셈”이라고 했다. 화장실이 외부에 있어 외국인이 불편해한다는 점과 더 따뜻해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그렇게 2003년 종로구 가회동의 한옥을 해체·복원한 국내 제1호 한옥 호텔 락고재가 문을 연다. 화장실이 방 안에 있는 한옥의 탄생!
◇15년간 100번 설계 바꿔
지난해 문을 연 2호 한옥 호텔 락고재 하회에는 30여 년간 쌓아 온 안 회장의 철학이 녹아 있다. 기와 색·돌 크기·소나무 위치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15년간 100번 이상 설계를 바꾸고 재수정을 거듭했다. “한옥은 도면에 모든 걸 그릴 수가 없다. 짓다 보면 예상과 다른 점이 너무 많다”고 했다.
락고재 하회 부지에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기왓장이 눈에 띄었다. “어라, 하회마을 한옥 기와는 흙빛이던데.” 안 회장이 껄껄 웃더니 “와장(瓦匠)들이 불량품이라며 버리려던 걸 생산해 달라 한 것”이라고 했다. 문화재 한옥에는 제품 인증 받은 흙빛 기와만 쓰기에 통상 색 바랜 기와는 버린다. 그는 “이런 기와, 저런 기와 섞인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으냐”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한옥의 멋은 ‘자연스러움’에 있다. 황토담 벽면은 기하학적 모양으로 홈이 파여 있었다. 마무리 작업으로 황토를 덧대기 전 흙이 잘 붙으라고 작업자들이 마구잡이로 파 놓은 홈인데, 안 회장이 “자연스럽고 보기 좋다”며 마감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단다. 그러면서도 전통의 멋을 살리는 데 충실했다. 차경(借景)을 위해 돌을 부수고 쌓아 부지 전체가 경사를 이루도록 했다. 창을 열었을 때 막히는 곳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산불로 갈 곳 잃은 주민들을 위해 한옥 학교가 있던 부지를 무상 대여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 ‘임시 대피소’ 45채가 지어질 예정. 안 회장은 “산불 이후 ‘놀러 가기 죄송스럽다’며 여행을 자제하신다는데 관광객 발길이 늘어야 상인들은 힘이 난다”고 했다.
또다시 짓고, 채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한옥은 고층으로 올릴 수 없어 부지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며 “전통 한옥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지하를 활용해 1.5층처럼 쓰는 방식도 구상 중”이라고 했다. 한옥 호텔에 있던 일부 고미술품으로는 락고재 하회 내부에 작은 박물관을 열 계획이다. “언젠가는 해외 박물관에 ‘실내 한옥 전시관’을 지을 겁니다. 재가 된 건물은 다시 지으면 되지만, 한옥의 정신은 사라지면 끝이니까요.” 다 불탔지만 꿈은 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