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왕께서 정무를 보았던 정전입니다. 현관 바닥이 네모반듯하지요? 순종 임금님이 타던 자동차가 문 앞까지 들어올 수 있게 평평한 돌로 널찍하게 리모델링한 것입니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희정당. 관람객 이동우(50)씨가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선왕조의 담박한 궁궐 건축도 화사한 정원 문화도 아니었다. 현장에서 만난 가이드였다. 마이크를 꼭 쥐고 한 시간 넘게 나란히 걸으며 창덕궁 곳곳에 얽힌 역사와 특성을 또박또박 풀어내는 가이드의 해박한 설명에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창덕궁에서 종종 눈에 띄는 이 나무는 열매도 꽃도 떨어져 가지만 앙상합니다. 그럼에도 궁궐 담 안에 지천입니다. 왜일까요? 맞습니다. 세종대왕께서 무척 좋아한 앵두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날 이씨 일행을 안내한 이는 지난 3월 국내 발달장애인 최초 ‘창덕궁 가이드’가 된 10개월 차 김주희(31)씨다. 주희씨가 가이드로 일할 수 있게 된 건 보건복지부와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추진한 ‘2021년도 장애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하면서다. 발달장애인은 반복 훈련을 통해 주로 단순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주희씨는 다독과 뛰어난 암기력, 피나는 성실성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가이드 협동조합인 가이드쿱에 들어가게 됐다.
어머니인 최금주(56)씨가 결혼 한 달 만에 임신한 주희씨는 눈 맞춤도 걸음마도 남보다 조금 느린 아이였다. 하지만 책을 읽어주면 몹시 신나 했다. 손 닿는 어디든 책을 놔두고 눈에 띌 때마다 읽어줬다. 서서히 말문이 트였다. 생후 48개월 때 한글을 뗐다. 주희씨가 지나간 자리마다 읽은 흔적 가득한 책이 수백 권씩 쌓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지적장애 판정을 받은 주희씨는 한 살 늦게 학교에 들어가 일반 학교의 특수학급에서 고교 과정까지 마쳤다. 그 후 동대문장애인종합복지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말을 재미나면서도 조리 있게 잘했다. 장애인재활상담사 박종범씨가 주희씨 능력에 주목했다. 마침 복지관과 발달장애인 일자리 찾기를 지원하는 꿈앤컴퍼니, 가이드쿱이 발달장애인들을 가이드로 키워내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주희씨는 그곳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현직 관광가이드와 예절교육사·웃음치료사·안내해설사 등으로부터 강도 높은 특훈을 받았다. 집에 간 후에도 서너 시간은 연습에 시간을 쏟았다. 관광객한테서 예상 못 한 질문이 나올 것에 대비해 보통 가이드 해설의 대여섯 배 넘는 분량을 외우고 또 외워 통째로 머리에 넣었다. 결국 100점을 받았고, 재능을 발휘할 곳으로 창덕궁을 뚫는 데 성공했다. 가이드쿱은 주희씨를 시범 채용해본 뒤 대만족해 가이드로 뽑았다. 이를 계기로 올 초 한국관광공사가 제작한 홍보 영상에도 출연했다.
복지부 장애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만 15세 이상 장애인은 256만명으로, 그중 돈을 버는 경제활동에 참가하는 비율은 37%에 불과하다. 전체 인구(63%)의 절반 조금 넘는 수치다. 주희씨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꿈만 같다며 “창덕궁은 내게 놀이터이고 제2의 고향이고 또 하나의 집”이라고 했다.
첫 월급 48만8320원을 받은 지난 4월 9일은 주희씨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어머니는 “세상에 그런 날도 있더라”며 웃었다. 주희씨는 가족들과 인사동에 가서 꿀타래로 한턱 냈다. 갖고 싶었던 실반지도 샀다. “제가 처음 산 거였는데, 번 돈으로 직접 사서 뜻깊었어요.” 무엇보다 좋은 건 ‘성취감’이다. “나라의 일원이 돼서 좋아요. 제힘으로 세금 낼 수 있어서 기뻐요.” 궁궐로 출근할 때마다 재작년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에 반드시 인사한다는 그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니고 산다고 했다”며 “내 별명은 느려서 ‘나무늘보’. 하지만 나는 조금 느릴 뿐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