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8시 40분 서울 서초구의 달빛어린이병원. 한 부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이 갓 지난 아이를 안고 왔다. 아버지 이모(41)씨는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고 몸이 축 늘어져서 병원을 찾는데, 이 시간에 큰 병원 응급실 말고는 문을 연 병원이 이곳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달빛어린이병원은 평일에는 오후 11시, 휴일에는 오후 6시까지 소아 환자들이 진료를 받을 수 있게 정부가 지정한 병원이다. 세 살 아들을 데리고 온 박하늬(32)씨는 “애가 열이 나고 콧물도 많이 흘리는데 응급실 갈 정도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내일 아침 동네 병원이 문 열 때까지 기다리자니 걱정이 돼서 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병원에는 5~10분에 한 명꼴로 환자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병원 관계자는 “야간에는 안양이나 평촌은 물론 남양주에서도 환자가 온다”며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야간 환자가 90명이 몰린 날도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22일 발표한 소아 의료 체계 개선 대책은 중증·응급 의료를 강화하고 야간·휴일에 발생할 수 있는 소아 진료 공백을 메우는 게 주요 내용이다. 특히 소아가 갑자기 아플 때 야간·주말에도 소아과 진료를 제때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인프라를 확충한다는 방침이다. 서울·인천·대구·경기·충남·경남에만 총 8곳 있는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를 미설치 지역에 2024년까지 4곳 늘린다. 현재 34개인 달빛어린이병원을 100개까지 늘리는 내용도 담겼다. 하반기부터는 소아 환자 부모가 언제든 전화 상담을 할 수 있는 ‘24시간 소아 전문 상담센터’를 시범 운영한다. 암이나 희소·난치 질환을 앓는 중증 소아 환자를 위해 현재 10곳인 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를 4곳 더 늘리고 소아암 지방 거점 병원을 5곳 지정한다.
상급종합병원의 소아 진료 기능도 강화한다. 상급종합병원은 3년마다 한 번씩 평가를 통해 재지정 절차를 밟고, 이를 기반으로 가산 수가를 받는다. 정부는 이 재지정 평가 기준에 소아 응급 전담 전문의 배치 및 24시간 소아 응급 진료 제공 여부를 포함시켜 각 병원이 소아 관련 기능과 인력을 확충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면서 소아 중환자실 입원료를 인상하고 병의원급 신생아실의 입원 수가를 높여 보상을 강화하기로 했다.
정부가 소아 의료 체계 개선 대책을 내놓은 것은 소아과 진료 기반이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출생으로 소아청소년과 인기가 떨어지면서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확보율은 2020년 68.2%에서 지난해 27.5%로 뚝 떨어졌다. 소아과 의사 1명당 소아 중환자 수는 6.5명으로, 일본(1.7명)의 4배 수준이다.
의료 현장에서는 이번 대책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그 실효성이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출생아 자체가 적고 소아과 지원자가 적은데 일부 수가를 올리고 소아 전문 진료센터를 늘린다고 해서 소아 의료 공백 우려가 해소되겠느냐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수가를 올리는 방향은 맞지만 비수도권의 의료 공백이 심각한 만큼 지역별로 자원을 적절히 분배하는 방안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확대하기로 한 달빛어린이병원의 경우 병원당 1억원 안팎의 운영비를 지원하는 안이 거론되고 있지만, 병원 관계자들은 “이 정도로는 야간 진료를 맡을 의사 한 명도 고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올해 충북 청주에 있던 달빛어린이병원 1곳이 의사 인건비 부담 때문에 운영을 포기했다.
대책의 윤곽은 나왔지만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소아 의료 체계 개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 수급 문제에 대해 이날 복지부는 “의료계와 협의해 의료 인력 확충을 추진한다”고만 언급했다. 문진수 서울대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당장 올해 전공의가 없어서 3월부터 진료 공백이 생기는 마당에 의사 확보 방안도 보이지 않고 이번 대책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지 구체적 방법도 빠져 있어 실제 효과가 어떨지 미지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