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9일 오전 호주 멜버른 시내에 있는 직업 교육 전문대 알마 마터(Alma Mater) 칼리지.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대만, 일본 등 아시아 각국에서 온 20~40대 외국인 20명이 호주의 ‘돌봄 인력 국가 자격증’ 취득 수업을 듣고 있었다. 실제 요양원에서 쓰는 기구들과 병원 침대가 갖춰진 교실에서 강사 라티(42)씨가 자동 전자 혈압기를 직접 몸에 차고 “노인이 팔을 움직여 혈압 측정에 실패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자, 한 학생이 “다른 팔의 혈압을 재야 한다”고 답했다.

이 학교는 지난해 4월 외국인 대상 ‘돌봄 자격증 교육 과정’을 신설했다. 돌봄 인력난을 겪는 호주 정부가 2023년 5월 돌봄업에 종사하는 외국인들에게 영주권을 쉽게 주는 내용의 이민 규정을 신설하면서 수업 듣기를 희망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호주는 2031년 노인 인구가 전체 20%가 넘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외국인 돌봄 인력을 유치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한국보다 고령화 속도가 느리지만, 호주는 돌봄 인력 확보를 범국가적인 과제로 설정해 선제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지난해 11월 21일 호주 월링턴의 한 요양원에서 호주인 환자 마거릿(오른쪽)씨의 거동을 인도네시아인 요양보호사 제니씨가 돕고 있다. 돌봄 인력난을 겪는 호주는 외국인 인력 유치를 위해 재작년 5월 영주권 신청 조건을 간소화하는 이민 규정을 신설했다. /오주비 기자

◇”간병 모르면 호주서 배우세요” 전문대 과정 열고 시급 올렸다

지난해 11월 21일 호주 멜버른에서 90km가량 떨어진 월링턴의 TLC 요양원. 인도네시아인 제니씨가 금발의 호주 노인 마거릿씨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줬다. 제니씨는 마거릿씨가 기상한 뒤 대소변 처리, 목욕, 이동 등 일상생활 전반을 도와주는 간병인이다. 제니씨는 “수다를 떨며 말동무가 돼 주는 일까지 내가 한다”며 “하루종일 한 몸처럼 붙어 지낸다”고 했다.

이 요양원은 그간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렸다. 저출생·고령화로 노인은 느는데, 돌봄 인력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호주 돌봄 인력 상당수가 한꺼번에 그만뒀지만 자리를 채울 새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곳을 비롯해 TLC 요양원 12곳에는 현재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네팔 등에서 온 100여 명의 외국인이 근무하고 있다. 요양원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 이후 특히 사람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안정적인 인력 확보를 위해 외국인을 채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호주는 한국보다 고령화 속도가 느리지만, 돌봄 인력난은 비슷하게 겪고 있다. 호주 언론들은 “특히 시골의 노인 요양 시설에서 간호사나 요양보호사를 구하지 못해 병상을 줄이기도 한다”며 “지역사회에서 구인에 실패한 뒤 호주 전역에 구인 공고를 내기도 한다”고 보도했다. 호주 경제 발전 위원회가 2021년 발표한 보고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을 경우 노인 돌봄 인력이 향후 10년 내에 11만명, 30년 내에 40만명가량 부족해진다”고 분석했다.

그래픽=백형선

호주는 2031년 초고령사회(노인 인구 20%)에 진입할 예정인데, 더 큰 돌봄 공백이 생기기 전에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인력을 유치 중이다. 한국에서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지난해에서야 E7 비자(숙련인력)에 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요양보호사’ 직종을 시범 사업으로 신설한 것과 대조적이다.

호주 정부는 2023년 5월 돌봄 인력 유치를 위한 이민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이 규정의 핵심은 ‘영주권 신청 간소화’다. 그간 외국인 돌봄 인력은 일정 교육을 받고 요양시설에 취직한 뒤 2년이 지나야 임시 취업 비자 신청이, 이후 3~4년을 더 근무해야 영주권 신청이 가능했다. 영어 시험 점수도 필요했다. 호주 정부는 이 절차를 크게 줄였다. 호주의 돌봄 자격증 등을 보유하고 있다면, 근무 2년 경력이 없어도 임시 취업 비자 신청이 가능하다. 3~4년이 추가로 더 소요되던 영주권 신청 요건 기간도 2년으로 줄였다. 영어 점수 기준도 낮췄다. 외국인을 위한 돌봄 자격증 교육을 제공하는 한 학교 관계자는 “이전엔 외국인이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호주 영주권을 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재작년 5월 정부가 노인 요양 산업 종사 외국인을 위한 이민 규정을 신설해 길이 열렸다”고 했다.

돌봄 인력 처우도 개선했다. 요양원 등은 요양보호사에게 최소 5만1222호주달러(약 4600만원)의 연봉 또는 호주 현지 시장 급여 중 더 높은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 요양보호사 등은 이민 규정이 발표된 재작년 5월 이전엔 호주 평균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다. 당시 이들의 주당 수입은 호주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약 43만원으로, 호주 평균보다 약 25만원 적었다.

정부뿐 아니라 지자체와 개별 시설들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돌봄 인력이 부족한 지자체들은 해외 지자체와 협약을 맺어 조직적으로 인력을 데려오고 있다. 호주 언론에 따르면 시드니에서 남서쪽으로 500km 떨어진 쿨라몬의 한 요양원은 필리핀에서 간호사 등 돌봄 인력 10여 명을 한꺼번에 데려왔다. 한 요양원 관계자는 “외국인 돌봄 인력이 잘 적응하도록 3개월간 머물 숙소를 제공해주고 쇼핑몰 같은 주변 시설을 데리고 다니며 알려주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각 학교는 외국인을 위한 ‘돌봄 자격증’ 교육 과정을 신설하고,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교육 과정을 마련했다. 호주 멜버른에 있는 직업 교육 전문대학에 다니는 베트남인 트랜 니아(49)씨는 “이론만 배우는 게 아니라, 요양원에서 쓰는 기계들을 직접 다뤄볼 수 있어 좋다”며 “이렇게 철저하게 배우니 현장에서 좋은 간병인이 될 것이란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