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국립기상과학원 내 ‘맨도롱 일터’. ‘맨도롱’은 제주 방언으로 ‘따뜻하다’라는 뜻이다. 이 90㎡(약 27평) 크기의 공간은 커다란 놀이방이자 작은 사무실이다. 책과 장난감이 갖춰진 놀이 공간과 커다란 책상이 있는 공부 공간, 그리고 연구원들이 일할 수 있는 컴퓨터 책상 공간이 한데 모여 있다. 이날 ‘맨도롱’을 찾은 아이 5명은 함께 보드게임을 하면서 놀았고, 가끔 엄마·아빠가 있는 곳으로 와 일하는 것을 구경했다. 김기훈(49) 연구관은 “아이 혼자 놀이방에 두고 사무실에 있으면 걱정이 되는데, 업무를 하면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아이들 방학 기간에도 육아 걱정이 없다”고 했다.
국립기상과학원이 우리나라 최남단인 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것은 태풍과 지진·해일 같은 위험한 기상 현상을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제주공항에서 내려 차로 1시간 반을 달려야 도착하는 이곳은 수십 년간 젊은 기상 과학자가 결혼·출산 연령만 되면 줄곧 떠나는 문제를 겪어왔다. 기상과학원에 입사한 젊은 연구자들은 처음에는 제주살이에 매력을 느꼈지만, 결혼·출산 시기에 가까워질수록 연고 없는 지역의 삶에 많은 한계를 느꼈다. 특히 아이를 낳고는 육지에 있는 부모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 보니 출산과 함께 퇴사하는 직원이 많았다. 그렇게 제주에 뿌리내리고 살기로 한 사내 부부만 주로 과학원에 남게 됐다.
젊은 연구자 이탈이 심각하자 기상과학원은 2021년 처음으로 청사 5층의 4평 남짓한 공간 하나를 ‘아이 돌봄방’으로 꾸몄다. 어린이집이나 학교가 방학일 때 아이를 맡기기 어려운 직원들을 위한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출근해 점심시간 때 만나 함께 밥을 먹고, 퇴근 후 같이 집으로 가는 연구원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연구원들이 일할 수는 없어서 아이들이 방치되는 문제가 있었다. 곁에서 보살핌이 필요한 유아는 아예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작년 5월 기상과학원은 육아 정책을 대대적으로 손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엄마 연구원’ 5명을 팀으로 꾸려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 기획에 나섰다. 단순한 놀이방이 아니라 놀이방과 일터가 공존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5층에 있던 기존 공간 대신 접근성이 더 좋은 2층으로 옮겼고, 건물에서 볕이 가장 잘 드는 남향 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 선택됐다. ‘맨도롱’ 기획에 참여했던 김지선(45) 연구원은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 위험이 없고, 놀이와 공부가 모두 가능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여러 어린이집과 공부방 인테리어를 참고했다”면서 “게임기와 커다란 TV를 놓자는 아빠 연구원들이 아내 연구원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하면서 6개월간 재밌게 공간 만들기 작업이 이뤄졌다”고 했다.
그렇게 벽 한편에 사무실처럼 파티션을 쳐 사내 인터넷망 접속이 가능한 컴퓨터 3대를 설치했다. 볕이 가장 잘 드는 안쪽 창가에는 숙제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커다란 책상을 뒀다. 다른 한편에는 책장과 장난감을 비치하고, 뛰놀 수 있는 넓은 공간도 마련해뒀다. 책과 장난감은 연구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에 나서 채웠다고 한다. 책 100여 권과 여러 장난감이 마련된 ‘맨도롱’은 공사 6개월 만인 작년 12월에 문을 열게 됐다.
부부인 김건후(42) 연구원과 인소라(41) 연구사는 이날 여덟 살, 여섯 살 두 딸을 데리고 출근했다. 아이를 데리고 오는 날이면 한 명씩 오전·오후로 나눠 맨도롱에서 일을 한다. 인 연구사는 “시댁은 경북 영주, 친정은 강원 속초라서 제주에서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방학 때마다 늘 걱정이었는데 아이를 돌보며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우리뿐만 아니라 앞으로 자녀를 낳을 기상과학원 후배들에게도 좋은 복지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아이들 방학 때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늘 문제였는데 청사에 데리고 오는 게 가능해지니 점심을 함께할 수 있는 것도 좋다”고 했다.
기상과학원은 제주가 고향이 아닌 연구원들이 육아 때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어려움을 고려해 작년 12월부터 아이가 5세가 될 때까지 원격 근무를 허용했다. 아이 낳고 5년 동안은 굳이 제주에서 지낼 필요 없이 재택근무 형태로 일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1년 육아휴직을 끝내고 직장에 복귀하더라도 재택근무를 통해 육아휴직과 비슷한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아홉 살 아들이 있는 이수희(43) 주무관은 “제주 생활을 하면서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 퇴사 고민이 가장 깊었었다”며 “앞으로 아이를 낳을 후배들은 이 제도를 이용해서 직장을 관둘 필요 없이 경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열 살 딸과 일곱 살 아들 아빠인 김기훈(49) 연구관은 육아 과정에 대해 “제 고향이 부산이고 아내는 충남 공주 출신이라 부모의 도움을 받기 힘들어 사내 부부가 아니었다면 두 자녀를 키우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국립기상과학원의 육아 환경 변화를 계기로 젊은 연구원들의 이탈 문제가 해소되고 아이와 가족들의 행복이 커지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