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이 저를 고통스럽게 해도, 이 병 또한 성장의 발판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어요.”
18일 오후 서울 도곡동 강남세브란스병원 강당에서 열린 제11회 ‘특별한 졸업식, 희망의 입학식’에서 만난 근위축증 환자 김민준(23)씨는 이렇게 말했다. 근위축증은 평생에 걸쳐 온몸이 점차 굳어가는 유전 질환이다. 어려움을 딛고 가톨릭대 심리학과 졸업과 동시에 쿠팡 소속 장애인 e스포츠 선수로 취업이 확정된 김씨는 “저는 매일매일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며 “한 번 사는 인생, 제가 해보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이날 행사는 근육병, 혈관 기형, 척수 손상 등 중증 희소 장애를 갖고도 학업을 계속해 대학 입학·졸업을 하는 환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열렸다. 11회 행사인 올해는 입학생 3명, 졸업생 4명 등 7명을 축하해주기 위해 비슷한 질병의 환자들까지 50여 명이 모였다. 열네 살 때 다이빙 사고로 인한 척수 손상을 딛고 국립대 철학과에 입학하는 한윤혁씨,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근육병 환자 정세종씨 등이 참석했다. 행사장엔 ‘한국의 호킹들,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김민준씨는 일곱 살 때 이 병원에서 근위축증을 진단받은 후에도 학업을 이어갔고, 취미로 시작한 e스포츠 분야에서 재능을 살려 취업에도 성공했다. 호흡기 근육이 굳기 전 병을 발견하고 조기에 호흡 재활 치료를 받은 덕분이다. 중학생 때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대학 전공을 심리학으로 선택했다. 동시에 취미로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을 하다가 대학생 때 참가한 e스포츠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직업으로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김씨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자유롭게 두 손을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항상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저에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고 했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김씨의 남동생도 지난해 신구대 e스포츠과에 입학한 데 이어 최근 쿠팡에 e스포츠 선수로 입사했다.
부산대 사회학과 입학을 앞둔 근위축증 환자 이지성(19)씨는 이날 행사에서 축사를 맡았다. 휠체어에 누운 채 강당 앞으로 나온 이씨는 종이에 준비해온 축사를 또박또박 읽었다. 이씨는 “저는 사회학도로서 호흡 재활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고안하며 관심을 촉진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며 “다른 환우분들 역시 각자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할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대학 진학 과정에 대해 “일상생활에서 숨이 매우 가빠올 때마다 강남세브란스 유튜브 채널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의료진께 조언을 구하며 일상과 학업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이날 행사 마지막에 이 병원 호흡기재활센터장인 강성웅(66) 재활의학과 교수의 퇴임식도 열렸다. 2009년 이 병원에 국내 최초로 설립된 호흡재활센터는 근육병, 루게릭병, 근위축증 등 희귀 신경·근육 질환자와 척수 손상 환자 등 호흡 재활이 필요한 환자를 치료한다. 한국의 호흡 재활 분야가 불모지였던 1990년대 미국에서 유학한 강 교수는 2000년부터 중증 호흡 질환 환자 약 1500명을 치료했다. 외래 진료 환자를 합치면 1만5000명이 넘는다. 이날 근육병을 앓고 있는 두 아들의 어머니 이명자씨가 보호자 대표로 나와 강 교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씨는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꿈을 꾸고 희망을 갖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건 교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덕분”이라며 “제 아들은 근육병을 일찍 진단받고 호흡재활센터에서 꾸준히 검사하고 치료받으며 지금은 대학교에도 다닐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강 교수는 동남아와 튀르키예, 중국 등지의 의료진에게 호흡 재활을 전수하고 케냐, 인도네시아 등 외국인 환자들도 한국으로 데려와 진료했다. 이날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세계 각국 호흡 재활 분야 의료진과 외국인 환자들이 강 교수에게 ‘Thank you, professor Kang(감사합니다, 강 교수님)’이라고 외치는 영상 편지가 소개됐다. 강 교수는 “환자들이 고비를 넘기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용기를 얻었다”며 “돌아보면 환자와 보호자들께 모든 게 고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