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소재 대학병원 외과의 A 교수는 며칠 전 제자인 의대생 5명을 만났다. 그는 “복귀를 설득하자 그중 한 명이 ‘정부가 ‘필수 의료 패키지’ 같은 엉터리 정책을 먼저 폐지해야 한다’고 하더라. 이유를 물으니, ‘(지도부) 선배들의 판단이다. 우리는 거기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답하더라”라고 했다.
정부는 작년 2월 ‘필수 의료 (지원) 정책 패키지’를 발표했다. 생명을 다루는 필수 진료과의 수가(건보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 인상과 소송 부담 완화가 주 내용이었다. 이는 지난 20여 년간 의료계가 정부에 해결을 요구한 양대 숙원이었다.
정부는 당시 이 정책이 ‘의대 2000명 증원’에 대한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반발을 상당 부분 누그러뜨릴 것으로 봤다. 의료정책연구원이 2023년 의대생 800명을 조사해 보니 52%는 “필수과를 전공하고 싶다”고 했지만, ‘낮은 수가’(49.2%)와 ‘법적 보호 부재’(19.9%) 때문에 망설여진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의대생 대표인 이선우씨는 지난 7일 수업 복귀를 거부하면서 “정부가 필수 의료 패키지를 먼저 철회하라”고 했다. 의대생의 핵심 요구를 담았다는 필수 의료 패키지가 되레 의대생의 ‘제1 타도 대상’이 된 것이다.
정부는 의대생이 복귀하면 내년도 의대 모집 인원도 증원 이전인 3058명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의대생 대표는 “붕괴된 의료 전달 체계를 먼저 확립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복잡한 전달 체계 해결엔 10년 이상이 걸릴 것이란 지적이 많다. 의료계 내에서도 의대생 움직임에 대해 “무조건 버티자는 벼랑 끝 전술을 쓰는 것 같다” “지금 의대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말 미스터리다”라는 말이 나온다.
◇피부·미용 등 미래 밥그릇 건드렸다고 ‘벼랑끝 전술’
대한소아청소년외과의사연합은 지난달 28일 “정부가 소아 외과의 저수가 문제 등을 인식해 보상을 강화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발표했다. 정부가 전날 소아 외과 수술의 보상 강화 방안을 발표하자, 총 50여 명이 전부인 우리나라 소아 외과 의사들이 환영 성명을 낸 것이다. 소아 외과 처우 개선은 필수 의료 패키지 내용이다. 세브란스병원의 한 교수는 “필수 의료 패키지는 내용 자체로만 보면 필수과에 작지 않은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고 했다.
실제 정부는 작년부터 올 3월까지 필수 의료의 수가 인상에 건강보험 재정 1조590억원을 배정했다. 수가 인상을 위한 목표 투입액(연 2조원)의 53%가 이미 배정됐고, 필수과 의사들이 현장에서 ‘수가 인상’의 혜택을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정부에 따르면 소아(체중 1.5kg 미만)의 동맥관을 차단하는 ‘경피적 동맥관 개존 폐쇄술’은 수가가 212만원에서 최근 1060만원이 돼 5배로 올랐다. 소아 충수 절제술(맹장 수술)도 96만원에서 480만원이 돼 5배로 올랐다. 막힌 심장 혈관을 뚫기 위해 스텐트를 삽입하는 심장혈관 중재술도 기존 수가(스텐트 4개 삽입 시)가 226만원이었으나, 이젠 463만원이 돼 두 배로 인상됐다.
여기에 보건복지부는 최근 필수 진료과 의사는 수술 부위 착오 등 어이없는 중과실을 범하지 않은 한 환자가 사망해도 처벌을 줄이거나 면제하는 의료 사고 처리 특례법 제정안의 핵심 내용도 발표했다. 정부는 올 상반기 안에 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다. 필수 의료 패키지엔 학생이 늘어난 의대에 2030년까지 국고 5조원을 들여 인력·시설·장비를 확충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 정책에 따라 올해부터는 기존 소아과에 이어 내과·외과·흉부외과 등 총 9개 진료과 전공의의 수련 비용을 월 100만원씩 국가가 지원한다. 의대생들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것들이다.
그런데 의정 갈등이 1년 이상 지속되면서 정부의 필수 의료 패키지 효과가 점차 가시화되자,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이젠 환자 선택권 침해와 의료 질 저하를 내세우며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내에선 “의대생과 전공의 지도부의 필수 의료 패키지 반대는 핑계일 뿐, 결국은 의대 정원을 줄여서 증원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라는 것”이라고 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도 14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이미 상당수 과제가 이행 중인 상황에서 (의대생들이 요구하는) 필수 의료 패키지의 전면적 철회 주장은 부적절하다”고 했다.
의대생들의 반발은 필수 의료 패키지 속 ‘비급여 진료 제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여기에는 도수 치료 등 비(非)중증·응급 치료의 실손보험 적용을 제한하고, 피부 시술을 의사 외 다른 직역에도 개방하는 방안이 담겨 있다. 이는 곧 의대생의 ‘미래 소득원’을 줄이는 것이어서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서울의 한 의대생(본과 3학년)은 “필수 의료 패키지 안에 있는 진료 면허는 우리에게 족쇄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진료 면허제는 의대를 졸업해 의사 면허를 따도 추후 1~2년간 수련을 하지 않은 일반의는 단독으로 환자 진료를 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정부는 환자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의대생 입장에선 의대를 졸업하고 피부·미용 시장에 바로 진입할 수 없게 된다. 그는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대에 온 것인데 협의도 없이 의사의 영역을 줄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