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한 학기만 가만히 있어라.”
올해 수도권 한 의대에 합격한 A씨는 지난달 술자리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24학번 선배들이 참석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전공의 선배들까지 여럿 몰려와 ‘의정 갈등’ 얘기를 꺼냈다. 선배들은 “무조건 단일 대오”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한다. A씨는 “너무 무섭고 당황했다”며 “이런데 학교에 어떻게 가겠느냐”고 말했다.

정부가 2026년 ‘증원 0명’을 내세우며 이달 말까지 의대생들의 복귀를 촉구하고 있지만 좀처럼 의대생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증원 정책 수혜를 본 25학번 신입생들까지 수업을 거부하는 건 문제”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선배들의 강요 때문에 학교에 못 나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사람들은 “성인인 대학생이 어떻게 선배 압박에 수업 거부를 하느냐”며 의아해하지만, 도제식 수련이 많고 커뮤니티가 좁은 의료계 특성상 선배의 회유와 압박이 먹히고 있는 것이다.
을지대 의대 학생들은 최근 신입생을 대상으로 ‘1학기 수업 참여 여부’를 묻는 익명 설문조사를 수차례 진행했다. 첫 조사에선 ‘수업을 듣고 싶다’는 응답이 절반 가까이 나왔지만, 조사를 반복하고 결과를 공개하니 결국 ‘수업 거부’ 응답이 늘어났다고 한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수업 거부’ 의견이 다수가 될 때까지 조사를 거듭한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강원 지역 한 의대 선배들은 학장이 주재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직후 신입생을 집합시켰다. 이들은 신입생들에게 “의사 세계는 좁다. 한번 (배신자) 낙인찍히면 평생 간다”는 취지로 말하며 수업 거부 동참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일 서울대 의대 선배들은 25학번들을 모아놓고 ‘필수 의료 패키지’ 등 정부 의료 개혁의 문제점을 알리는 설명회를 열었다. 이 밖에도 선배들이 보는 앞에서 휴학계를 쓰게 하거나, 휴학계 인증 사진을 취합하는 학교도 나왔다.
학교에 복귀하겠다는 학생을 공개 비판하며 ‘의료계 커뮤니티’에서 완전 배제하겠다고 협박한 사례도 14일 교육부에 신고됐다. 건국대 본과 3학년 휴학생들은 지난달 입장문을 내고 “이탈자의 파국적인 행동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이탈자는 더 이상 동료가 아니며, 향후 모든 학문적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다. 이 학교 본과 2학년 B씨는 “최근엔 ‘복귀자들은 빼고 단체 채팅방을 새로 만들 거니까 어차피 신상은 공개된다’는 공지를 받았다”면서 “휴학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국대 측은 14일 “수업 방해 부당 행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걸 확인했다”면서 “학칙에 따라 징계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공지했다.
충청권 한 의대에서는 선배들이 ‘신입생 OT’를 연다고 하자 휴학을 종용당할까 봐 우려한 신입생 학부모가 대학 측에 신고하는 일도 있었다.
복귀한 의대생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심각하다. C씨는 “복귀 의사를 표명하자 ‘시험 기출 문제’를 볼 수 있는 구글 드라이브 접근 권한이 없어졌다”면서 “메시지로 ‘소명할 기회를 드리는 게 우리(휴학생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니 이유를 말해보라’고 한다. 죄인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한 본과 3학년 복귀자는 “이미 동기 선후배에게 너무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고 있다”며 “전공의로 수련을 더 할 생각인데 이미 낙인이 찍혀 학회에서도, 병원이나 진료과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학부모들도 속이 탄다. 한 수도권 의대 25학번 학부모는 “선배들이 애를 불러내 ‘술 마시고 미팅이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는데, 수업 듣지 말라는 얘기 아니냐”면서 “힘들게 의대에 보내놨는데 마음대로 수업도 못 듣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작년 3월부터 ‘휴학 강요’ 등 의대생 괴롭힘 신고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14일까지 신고 사례 14건을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사·의대생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복귀자 명단과 욕설이 올라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