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우울감을 경험하는 국민이 매년 늘어 두 명 중 한 명은 우울감을 겪은 것으로 27일 나타났다. 정신 질환에 대한 편견이 강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어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길 꺼리거나 정신건강의학과를 기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본지와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의 정신 건강 실태를 조사한 결과다. ‘우울감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앞서 서울대가 진행했던 조사에서 11.5%(2018년), 26.2%(2021년)였으나 올해는 49.9%로 늘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자해를 하려는 생각을 한다’는 응답도 2018년에는 한 자릿수(4.6%)였는데 올해는 22.2%로 급증했다.
그러나 우울감이나 정신 건강 악화를 느낄 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참는 편’이란 답은 88.3%에 달했다. 네 명 중 한 명(25.7%)은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경증인 우울증을 방치하고 의료진 상담이나 약물 치료를 피하다 보면 중증 질환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윤영호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장(가정의학과 교수)은 “국민의 정신 건강을 개인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로 보고 정부, 기업, 학교 등이 ‘원 팀’으로 함께 해결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친구들 등 돌릴까봐, 취업에 안 좋을까봐… 정신과 안 간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강모(26)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약 5년 동안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우울과 불안 등의 증상에 시달렸지만 병원에 한 번도 간 적 없다. 강씨는 “마음이 힘들었지만 정신과 병·의원은 심각한 질환을 앓는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며 “정신과 약을 복용하면 왠지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고 했다.
국민의 전반적인 정신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지만, 정신건강의학과 방문을 꺼리는 등 사회적 편견이 여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본지와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 설문 조사에서 ‘정신 건강이 악화되더라도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거나 약물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답이 71.5%에 달했다.
정신적 문제를 알렸다가 사회적으로 더욱 고립되거나 각종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큰 탓이다. 응답자들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 기록이 있으면 취업 및 사회생활에 불이익이 있다”(88.7%), “정신질환에 걸리면 몇몇 친구는 나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69.4%)라고 답했다. 겉으로 드러나 적극적 치료를 받는 신체 질환과 달리 정신 질환은 ‘숨겨야 하는 병’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울감을 느끼는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22.2%), ‘직장 스트레스’(20.6%), ‘대인 관계’(12.7%), ‘취업·결혼·노후를 비롯한 미래 불안’(12.6%) 등 누구나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일들이었다.
정신 건강에 대한 낙인과 편견은 음지에서 질환을 키워가는 ‘그림자 환자’를 낳고 있다. 로스쿨생 오모(27)씨는 “학업 스트레스로 정신과에서 한 번 상담을 받아봤지만 이후론 가지 않았다”며 “정신과에 다닌 사실이 알려지면 나중에 취업에 불이익이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정신과 기록은 환자 본인만 열람할 수 있다. 제3자에 대한 정보 제공도 범죄 피의자 진료 기록 확인 등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한다. 채용이나 임용, 승진, 대학 진학 등을 이유로는 건강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
임신부 A씨는 “항상 기운이 없고 지쳐 산전 우울증 증세인가 했지만 처음엔 남편한테 말하기도 미안했다”며 “결국 정신과를 찾았지만 시댁과 친정에는 이런 사실을 숨겼다”고 했다. 장원석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부회장은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치료가 필요한 소아·청소년 중에도 친구들에게 놀림받을까 봐 약을 안 먹는 경우가 있다”며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거부감이 예전보다는 낮아졌지만 꾸준한 치료를 받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정신과 약물 치료에 대한 근거 없는 우려도 여전하다. 직장인 김모(30)씨는 불안·공황 증세를 느껴 지난 1월 정신과에서 항우울제와 긴장을 낮춰주는 약물을 처방받았지만 일주일 뒤 복용을 중단했다. 의료진은 “우울증 약을 꾸준히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김씨는 “우울증 약을 먹으면 뭔가 몽롱해지고 행동이 느려져 바보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정신 건강 치료를 꺼리는 이유로는 비용에 대한 우려와 정보 부족도 적지 않았다. 본지·서울대 조사에서 정신 건강과 관련해 외부 도움을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시간이 지나면 호전될 것으로 생각’(45%·이하 복수 응답)이란 답이 가장 많았다. 이어 ‘비용 부담’(28.4%), ‘적절한 상담 기관을 몰라서’(19.6%) 등이었다. 정부나 기업에 원하는 정신 건강 서비스로는 ‘무료 심리 상담’(73.8%), ‘정신 건강 교육’(45%), ‘직장 내 지원’(35.3%) 등이 꼽혔다. 윤영호 서울대 교수는 “신체가 아프면 곧바로 병원을 찾듯이 정신 건강도 조기 진단과 꾸준한 치료가 필요하다”며 “정부, 지자체, 기업, 학교 등이 다 함께 정신 건강을 위한 환경 조성에 나서고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