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최고 의료 기관인 서울대병원에서 정년 퇴임한 소아청소년과 명의들이 최근 진료 현장에 돌아왔다. 이들이 향한 곳은 수도권의 대형 병원이 아닌, 강원도 춘천의 강원대병원이다. 지난해부터 이 병원에 합류한 서울대 출신 소아과 교수는 총 4명. 이 중 3명은 서울대병원에서 수십 년간 진료와 교육에 몸담은 뒤 퇴임한 원로 교수들이다.
강원대병원은 강원 3권역(춘천·원주·강릉) 중 유일하게 어린이 병원이 있는 종합병원이다. 하지만 지난해 의정 갈등 사태로 마지막 1명 남은 소아과 전공의마저 떠나면서 진료 공백 우려가 커졌다. 현재는 소아과 전공의·전임의(세부 과 전문의) 모두 없는 상태다.
강원도 암센터 위해 “내가 갈게요”
4명 중 가장 먼저 강원대병원에 간 건 소아혈액종양과 전문의 신희영(70) 교수다. 그는 2021년까지 33년간 서울대병원에서 근무했고, 지난해 2월 강원대병원 진료를 시작했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강원을 포함한 전국 다섯 지역에 소아암 진료 센터를 만들 계획이었는데, 강원대병원은 “소아암 환자를 진료할 의사가 없다”며 예산을 반납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 교수는 “내가 가겠다”며 강원행 기차에 올랐다. 마침 서울대 의대 후배인 조희승(55) 교수가 강원대 어린이병원 원장을 맡고 있었다.
신 교수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서울 청량리역에서 ITX를 타고 춘천으로 출퇴근한다. 왕복 4시간이 걸린다. 주변에선 “나이도 많고 당뇨도 있는데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지 않으냐”고 걱정했다. 신 교수는 “기차 타고 몇 시간을 오가며 진료를 보는 게 육체적으로 쉽진 않지만, 아이 한 명에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진료를 하러) 와야 한다”며 “이 나이까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신 교수가 진료하는 한 어린이 환자의 아버지는 “서울에 한 번 다녀오려면 하루가 걸렸는데, 지금은 아이를 가까운 강원대병원에 데려올 수 있게 됐다”며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강원 지역에서 소아암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전문의는 현재 그가 유일하다.
뒤이어 합류한 김병일(69) 교수는 신생아과 전문의다. 올해 2월 강원대 어린이병원 신생아 중환자실(NICU)에서 당직 근무를 시작했다. 신생아 중환자실은 임신 37주 미만의 미숙아, 체중 2.5㎏ 미만의 저체중아 등 고위험 신생아를 24시간 집중 치료하는 곳이다. 김 교수는 작년 의정 갈등으로 병원을 떠난 의료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현장에 투입됐다. 현재 주당 근무시간이 40시간에 달한다.
헌신 이끌어 낸 강원대 어린이병원장의 설득
그가 2000년대 초 서울대병원 교수 재직 당시 전임의로 함께 근무했던 조희승 원장이 “서울에 있는 아이들만 치료받을 게 아니라, 강원 지역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의 의술이 닿길 바란다”며 설득했다. 김 교수는 “사실 은퇴 이후엔 일을 줄일까 고민 중이었는데, 제자인 조 원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장 상황이 너무 심각했다”며 “특히 신생아 중환자실 같은 곳은 비워두면 아이들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나라도 나서야 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적어도 이번 의료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는 진료 현장을 지킬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은 젊은 의사도 많고 여건도 좋은데, 강원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는 지켜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엔 ‘감독’처럼 후배들을 가르치고 도와줬던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배우’로 복귀해 현장에서 직접 진료하며 돕고 있다”며 “몸은 힘들고 고되지만, 신생아 의료만큼 보람 있는 건 없다”고 했다.
신 교수와 김 교수 모두 강원도와 인연이 있다. 신 교수는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공중보건 전문의로 춘천도립병원(현 강원대병원)에서 3년간 근무했다. 그는 “당시 춘천 시내에 소아과 전문의가 나 포함 두 명뿐이어서 하루에 80명, 많게는 100명씩 아이들을 진료했다. 치료가 필요한 어린이들이 모두 나에게 왔다”고 했다. 김 교수는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여름·겨울방학마다 당시 완전한 무(無)의촌이었던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으로 의료 봉사를 다녔다고 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황용승(75) 교수는 지난달부터 소아 신경 진료를 맡고 있다. 매주 수요일 오전·오후 외래 진료를 보고 있다. 뇌전증, 두통, 발달장애 등 질환을 주로 진료한다. 2005년 서울대 어린이병원장을 지낸 그는 정년 퇴임 후 아랍에미리트 왕립병원, 우리아이들병원 등을 거쳤다. 어린이 환자들은 왕복 3~4시간씩 차나 기차로 이동해 진료받는 것을 힘들어한다. 특히 뇌전증, 발달장애 등을 가진 어린이 환자는 장거리 이동이 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의정 갈등 의료진 공백까지 메워
황 교수는 “뇌전증처럼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까운 병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며 “뇌전증은 평생 약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아이는 2~3년 약 쓰고 완치되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계속 진료 현장에 남아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진료를 언제까지 이어갈 계획이냐는 질문에 황 교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생각”이라며 “병원에 풀타임으로 근무할 전문의가 새로 채용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넘겨주고 물러나면 된다”고 했다. 김 교수와 황 교수도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출퇴근하고 있다.
같은 시기 강원대병원에 합류한 김호성(62) 교수는 소아 심장 전문가다. 그는 서울대 출신 4명 가운데 아직 정년(65세)에 이르지 않은 비교적 젊은 나이다. 서울대병원 전임의를 마치고 보라매병원, 아랍에미리트 왕립병원, 고려대 안산병원 등에서 근무했다. 현재 월·수요일 오전·오후 외래, 야간 당직까지 포함된 24시간 근무를 하고, 금요일에는 오전 외래를 본다. 평일엔 춘천 숙소에 머물고 주말에 서울 집에 다녀온다. 김호성 교수는 “병동에는 비교적 가벼운 질환으로 입원한 환자도 있지만, 더 힘들고 위중한 상태의 환자도 많다”며 “그런 아이들을 치료할 때 느끼는 보람이 더 크다”고 했다. 최근에는 생후 3개월 아기에게서 심장 기형을 발견하고, 서울대병원 측에 직접 연락해 며칠 내로 치료가 이뤄지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조희승 원장은 “교수님들이 서울에서 쌓은 훌륭한 의술을 강원 지역 아이들에게도 나누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며 “선배들이 ‘다시 한번 함께 해보자’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해 지역 의료를 살리고 있다”고 했다.
☞신희영·김병일·황용승·김호성
강원대병원에 가장 먼저 합류한 신희영(70) 교수는 경기고, 서울대 의대를 나온 소아혈액종양과 전문의다. 서울대 어린이병원학교 교장, 서울대 이사, 연구부총장, 대한적십자사 회장(2020~2023년) 등을 지냈다.
신생아과 전문의인 김병일(69) 교수는 용산고, 서울대 의대를 나와 연건동 본원과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근무했다. 대한신생아학회장 등을 지낸 그는 2016년 이른둥이 치료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황용승(75) 교수는 소아신경과 전문의로 경기고, 서울대 의대를 나왔다. 서울대 어린이병원장, 대한소아신경학회장 등을 지냈고 대통령실 소아청소년과 자문의(2008~2013년)로도 활동했다.
소아심장과 전문의 김호성(62) 교수는 상문고,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 운영 보라매병원에서 근무했다. 개업의를 거쳐 아랍에미리트 왕립병원, 고려대 안산병원에서도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