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 시대의 조선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전설적 지도자였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경력과 미국에서 수행한 독립운동은 그의 명성을 한껏 높였다. 그래서 해방 뒤에 나온 모든 정당이 그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도 주석에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이승만을 올렸다. 덕분에 이승만은 가장 큰 추종 세력을 이끌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자연히, 당시 남한 정계의 관심은 이승만의 후계자 자리로 쏠렸다. 명...

1954년 11월 27일 국회는 제2차 헌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쳤다. 개표해 보니,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개헌안은 재적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되는데, 당시 재적 의원은 203명이었다. 따라서 제2차 개헌안은 135.333…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1표가 모자라자, 사회를 맡은 최순주 부의장은 부결을 선언했다. 이튿날 갈홍기 공보처장이 “개헌안은 통과된 것으로 본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
‘시장경제(market economy)’라는 말이 나오기 반 세기 전부터 이승만은 시장경제 신봉자였다. 그가 경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895년에 발간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바깥세상의 상업과 교역을 알게 된 일이었다. 그 뒤로 세계 경제를, 특히 발전하고 융성하는 미국 경제를 공부하고 관찰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제관을 세웠다. 1945년 6월 미국에서 그가 주도한 ‘대한민주당’이 창립되었다. 이 정당의 정책 가운데 하나는...

이승만의 휴전 반대에 대한 미국의 반응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고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선언한 뒤로, 미국은 그를 제거하는 계획을 다듬었다. 마침내 1953년 5월 24일 UN군 최고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확정했다. 이 대통령을 임시 수도 부산에서 다른 곳으로 유인한 다음, 미군이 부산에 진입해서 이 대통령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한국군 참모총장이...

1951년 4월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그가 한국전쟁을 제한전(limited war)으로 치르려는 트루먼 정권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원자탄을 쓰지 않는 제한전을 하기로 미리 방침을 정한 터라, 미군은 풍부한 인적 자원을 지닌 중공군에 이길 수 없었다. 승산이 없기는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내리 다섯 차례의 공세를 폈지만, 중공군은 얻은 것이 없었다. 인해전...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상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유엔군 최고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으로부터 들었다. 도쿄에서 급히 날아온 리지웨이가 김포공항의 간이 건물에서 그에게 압록강까지 갈 수는 없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리지웨이의 설명이 끝나자, 이 대통령은 유엔군 최고사령관의 팔을 붙잡았다. “장군, 당신은 매우 설득력 있게 말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하셨습니다.” 그 뒤로 이 대통령은 줄기차게 휴전에 반대했다...

1945년 10월에 귀국한 뒤, 이승만이 늘 마음을 쓴 것은 남한을 지킬 군대 양성이었다. 북한엔 이미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 교리에 따라 북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한 터였다. 주한 미군 지휘부는 북한의 이런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1946년부터는 미군 철수 이후에 북한군이 남침할 가능성을 공공연히 거론했다. 그래도 그들은 남한의 국방 능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군대를 양성...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면서,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를 따라 일본에 이르고 그 뒤엔 류큐 제도로 뻗는다. … 방어선은 류큐 제도에서 필리핀으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대만과 남한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는 얘기였다. 뒷날 공화당 지도자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이 지적한 대로, 애치슨의 연설은 공산주의 세력이 두 나라를 “공격하라는 초대장”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누린 우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시작되기도 전에 결판이 난 전쟁이라고 북한 지도자들은 믿었다.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하는 스탈린에게 “미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남조선을 다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전면 침공 보고를 받은 것은 6월 25일 10시였다. 이후 엇갈리는 보고들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그는 두루 살피고 멀리 내다보면서 과감하게 대응했다. 먼...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재적 의원 198명 가운데 196명이 출석해서 투표했는데,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엔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7월 24일 부슬비 내리는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나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그날 오후부터 집...

‘5·10 총선’부터 보름이 지난 1948년 5월 31일에 국회 본회의가 열렸다. 오전 회의에서 이승만이 198표 가운데 188표를 얻어 국회의장으로 뽑혔다. 부의장엔 신익희와 김동원이 뽑혔다. 오후엔 국회 개회식이 열렸다. 애국가 봉창(奉唱),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만세 삼창으로 이어진 의례가 끝나자, 이승만 의장의 식사(式辭)가 있었다. 그는 “우리가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야 모인 것...

1948년 1월 한국에서 선거를 실시하는 일을 주관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리아, 프랑스, 중국, 인도, 엘살바도르,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필리핀의 8국 대표들은 인도 대표 메논을 임시의장으로 뽑았다. 메논은 하지 주한 미군 사령관과 겐나디 코로트코프 러시아군 25군 사령관에게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코로트코프는 답신하지 않았고, 대신 유엔 주재 러...

2차 세계대전 뒤 한반도 문제가 다루어진 첫 국제 회의는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①한국임시정부의 설립, ②미군과 소련군의 ‘공동위원회’의 설치, ③5년 기한 강대국들의 한국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강대국들이 신탁 통치를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남한 주민 모두가 반대에 나섰다. 좌익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조선공산당은 “만일에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하면,...

정치는 돈이다. 정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독립운동은 순수한 정치 활동이지만, 망명정부 지도자는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마땅치 않다.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짓누른 짐이었다.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가 서자,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에 뽑혔다. 그러나 상해의 정부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상해의 요인들은 대통령에게 상해로 와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이 수락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독립운동 직후 1919년에 상해에서 세워졌다가 1945년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면서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렇게 26년 동안 존속하면서, 임시정부는 줄기차게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끝내 영토와 인민을 되찾아 대한민국을 세웠다. 이런 성과는 현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공군까지 편성한 자기 군대를 갖추고 제2차 세계대전에 당당히 참전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소비에트 러...

연재를 시작하며 조선의 근대화는 개항(開港)이라 불린 변혁으로 시작되었다. 본질적으로, 개항은 우세한 유럽 문명의 도래라는 도전(challenge)에 대한 조선의 대응(response)이었다. 중세 사회였던 조선이 현대 사회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대응이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근대화 과정을 이해하는 일에선, 중요한 고비들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행적을 살피는 것이 좋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