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과 인도 항로 발견 등 대항해 시대를 연 항해 혁명은 인류사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로써 해상 무역과 문물 교류가 활성화되어 서양이 비로소 동양을 추월해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항해 혁명을 성공시킨 진원지 포르투갈에 대해 알아보자.
유럽의 서쪽 끝에 놓인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해양 국가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들로부터 많은 해양 기술을 습득했다. 이슬람은 갤리선을 범선으로 대체해 돛만으로도 바람을 거슬러 항해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이슬람은 경제력, 군사력, 과학 기술,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양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아라비아에서 농사법, 모직물 제조, 항해, 천문, 지리, 지도 제작, 조선 기술, 행정·사법·군대 제도 등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도입되거나 개선, 개량되었다.
역대 포르투갈 왕들은 해상 강국을 꿈꾸며 국민에게 해운을 장려하여 많은 인센티브를 주었다. 특히 페르난두 왕(재위 1367∼1383)은 100톤 이상의 큰 배를 건조할 경우, 왕실 소유 삼림의 나무를 자유롭게 사용토록 했다. 그리고 배를 건조하기 위해 수입하는 원자재는 관세를 면제했다. 외국에서 건조된 100톤 이상의 배를 수입할 때도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배를 만드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들은 해운업에 진력할 수 있도록 병역도 면제해 주었다. 또한 선박이 난파되거나 적에게 강탈되었을 때 선주에게 보상을 해주는 해상보험 제도도 실시하는 등 해운 발전에 노력했다.
◇포르투갈의 세우타 점령, 서구 최초의 해외 식민지
포르투갈은 제일 먼저 해상 팽창의 뇌관 구실을 했다. 1415년 엔히크(Henrique) 왕자는 아버지 주앙 1세가 이끄는 아프리카 세우타 정복 전쟁에 참전했다. 엔히크는 포르투갈에서 쫓겨 간 무어인들이 다시 포르투갈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섬멸하는 게 목표였다. 1415년 8월 15일 지브롤터 해협의 세우타 앞바다에 238척의 포르투갈 군함이 나타났다. 4만5000여 포르투갈 군인은 무어인들을 백병전으로 격파하고 세우타를 함락시켰다. 이는 탐험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슬람권의 중요한 교역 도시인 ‘세우타’ 점령은 유럽이 처음으로 자기 대륙 바깥에 건설한 최초의 ‘해외 식민지’였다.
세우타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 남단의 지브롤터와 마주하고 있다. 세우타는 카르타고인들이 건설한 항구로 지중해 출입구를 지키는 전략적인 요충지인 관계로 로마· 반달· 비잔틴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고, 771년부터는 아랍령, 1415년부터는 포르투갈령, 1580년부터는 스페인령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스페인 관할 지역이다.
포르투갈의 세우타 침략은 무어인의 침략 방지와 해상 무역 확대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한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금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브롤터 해협의 세우타가 10세기부터 순도 높은 금화를 주조한 금의 산지라는 점이 포르투갈의 정복 의욕을 부추겼다. 당시는 금 소유량이 곧 국부의 지표였다. 점령 직후부터 포르투갈은 세우타 금화를 그대로 본떠 포르투갈 금화를 찍어냈다. 아프리카의 금이 포르투갈에 쏟아지고 있다는 소식은 유럽 각국을 바다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특히 포르투갈이 금화를 찍어 유통시키자 그때까지 금화가 없었던 스페인이 크게 자극받았다. 이후 세우타 점령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항해로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경쟁이 봇물처럼 터졌다.
◇세우타에서 항해 왕자 엔히크의 꿈이 영글다
그런데 정작 엔히크가 세우타에서 본 것은 무어인들의 엄청난 향신료였다. 그곳에는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에서 온 물건을 파는 상점이 수천 개나 있었다. 후추, 정향(丁香) 등 다양한 종류의 향신료가 창고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엔히크는 이슬람 상인을 거치지 않고 향신료를 직접 수입할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한다면 포르투갈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생각은 이미 동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향신료 길에 오스만제국이 버티고 있어 바다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엔히크는 선대를 편성해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마데이라 제도와 포르투 산투 제도를 포르투갈령으로 만들었다. 1419년 그는 포르투갈 남단 알가르베 주의 총독이 되었다.
◇엔히크, 세계 최초의 항해학교 설립
엔히크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그는 사그레스 항구에 항해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그리스 조선 기술자, 유대인 천문학자와 지도 제작자들을 초청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항해학교를 설립해 우수한 항해 기술자들을 길러내는 한편 조선소를 만들어 선박을 개량하는 등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대항해를 준비했다. 그의 위대한 점은 그간의 경험에 의존하기보다는 과학적인 시스템에 의해 대항해를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기독교 지리학자들이 그린 조잡한 지도를 버리고 대신 훈련된 항해사들이 실제 답사해서 그린 해도를 하나하나 맞추어 정확한 지도를 제작했다. 정확한 지도야말로 항해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이 분야에서도 세계 곳곳에 커뮤니티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 탁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수학, 정밀 도구의 제조, 지도와 항해도 제작 등에 뛰어난 기술자들이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지도 제작자로 평가받는 유대인 자푸다 크레스케스를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에서 사그레스로 모셔왔다.
엔히크 왕자는 그가 훈련시킨 선원들에게 정확한 항해 일지와 해도를 작성하고 해안에서 본 모든 것을 반드시 기록하도록 했다. 사그레스에는 포르투갈인은 물론 유대인, 무어인, 이탈리아인, 스칸디나비아인, 여행자,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지도 제작은 정밀 과학의 수준으로 올라섰다. 또한 아직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던 항해용 나침반이 사용되게 되었고, 유대인 랍비이자 천문학자 아브라함 자쿠토가 개발한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거리 항해 기구 아스트롤라베가 제작되었다. 이 기구 덕에 비로소 북극성을 볼 수 없는 남반구에서도 원양 항해가 가능해졌다.
◇삼각돛의 카라벨(caravel)선 개발
세우타 점령은 엔히크 왕자를 스타로 만들었다. 최전선에서 공격을 주도했던 21세의 엔히크 왕자는 유럽 각국으로부터 자신들의 군대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였다. 각국 왕실로부터 청혼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엔히크의 선택은 오로지 바다였다. 각국의 청을 마다하고 조선소와 해양연구소를 설립하고 먼 거리 항해에 적합한 삼각돛의 카라벨 선을 개발했다. 카라벨 선은 삼각형의 돛을 사용해 역풍에 강할 뿐 아니라 배 밑바닥이 평탄하고 너비가 좁아 속력이 빨랐다. 삼각돛은 항해사에 한 획을 긋는 획기적 변화였다.
◇항해의 역사를 바꾼 삼각돛
삼각돛이 발명되기 전까지 바다에서 이동은 제한적이었다. 사람이 노를 젓는 갤리선 아니면 뒤편 바람을 이용해 앞으로 나가는 범선 정도였다. 바람이 앞에서 불어오면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범선은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 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바람(육풍)을 이용해 바다로 나갔다가, 낮에 반대로 부는 바람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오는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오스만제국에 의해 실크로드 길목이 막혀버리자, 유럽 각국은 바다를 통해 동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거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동양까지 노를 젓는 갤리선이나 사각 돛의 범선으로 가기는 불가능했다.
삼각돛은 이슬람 선단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전해졌다. 아마 그들도 7~8세기 아랍 상인들이 동아프리카에서 인도까지 항해하는 데 사용한 다우선의 삼각돛을 보고 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각돛을 이용하면 뒤에서 부는 바람은 물론, 앞에서 불어오는 역풍에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 이전까지의 돛은 대부분 옆으로 펼친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삼각돛은 배의 앞쪽에 달린 삼각 모양의 돛을 좌우로 회전시키면 지그재그 형태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삼각돛이 역풍에도 앞으로 나가는 원리는 돛의 바깥쪽 바람이 돛 안쪽 바람보다 빠르게 흐르면서 바깥쪽 압력이 낮아져 배를 앞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생긴다. 이는 비행기를 뜨게 하는 양력인 ‘베르누이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삼각돛의 발명으로 노 없이 바람만으로도 먼 거리를 운항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편서풍이 부는 북위 30도에서 60도 사이에서 해상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역풍에도 앞으로 나가는 배가 필요했다. 서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삼각돛을 이용해 포르투갈에서 해안선을 따라 아프리카까지 장거리 항해에 성공했다. 이로써 드디어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바다를 이용해 운반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은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낙타나 말이 운반하는 상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다양하고 규모가 커졌다.
◇최초로 적도 이남의 바다를 탐험하다
엔히크는 해양학교 출신 항해자들을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보자도르곶 남단의 바다를 탐험하는 항해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으로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기반으로 1431년에 아조레스 군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1418년 정복한 마데이라와 이 섬들을 곡물, 사탕수수 경작과 인디고 염료용 대청 재배 산지로 만들었다. 특히 사탕수수와 대청은 포르투갈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당시는 아프리카 서안 보자도르곶을 대서양의 끝으로 보았다. 당시 뱃사람들은 그 아래 ‘암흑의 녹색 바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쪽으로 항해하는 것을 꺼려했다. 열대 바다는 뜨겁기 때문에 바닷물이 펄펄 끓는 해역을 항해하게 되면 모두 검둥이가 된다고 생각해 항해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죽음의 바다로 알려진 그곳을 탐험해 보겠다는 항해자들에게는 어떤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도 돛만으로 원양 항해가 가능한 크고 성능 좋은 배를 지원했다. 1434년 탐험가 질 에아네스가 도전해 카나리아 제도를 발견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이듬해 마침내 그곳으로부터 240㎞ 정도 떨어진 보자도르곶에 도달했는데, 펄펄 끓는 바닷물이 없는 고요하고 푸른 바다였다. 공포가 사라지자 이제는 더 남방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대항해를 가능케 한 쾌속범선 캐랙선(Carrack)의 등장
15세기 들어 선박의 모습이 급격히 달라졌다. 1400년대의 배는 주로 돛대와 돛이 1개씩이었다. 그러나 먼 거리 탐험에 필요한 선박으로 개량되면서 돛의 수가 3개로 늘어났다. 3개의 삼각돛만을 쓰는 가볍고 기동성이 뛰어난 카라벨선이 제작된 후 개량을 거듭해 사각 돛도 함께 쓰는 쾌속 범선이 등장했다. 삼각 돛대 하나, 사각 돛대 두개, 다시 삼각 돛대 하나, 이런 식으로 구성된 이 배는 뛰어난 기동성을 지녔다. 캐랙선은 역풍에 유리한 삼각돛과 순풍에 유리한 사각 돛의 장점을 혼용했다. 그래서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 데 적합했다. 1430년 포르투갈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 배는 먼 거리 항해에 안성맞춤이었다. 엔히크 왕자가 이 배를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에 사용했다.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도 캐랙선이었다.
◇포르투갈의 대항해
캐랙선의 등장으로 비로소 먼 거리 항해가 가능해졌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 불과 30년 사이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1492),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며(1498∼1499), 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했다(1519∼1522). 이로써 대항해 시대가 활짝 열렸다. 캐랙선 크기는 점차 커져 15세기 400톤 정도였던 것이 16세기에는 1000톤 이상이 되었다.
스페인에서와 같이 중세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들이 상업과 대부업, 의사, 관리 등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대략 9만명의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이어 유대 경제와 문화를 이어가는 곳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곳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4년 뒤 포르투갈도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야망이 큰 마누엘 왕이 반유대 정책을 고수하는 스페인 왕국과의 정략결혼을 위해 유대인 추방을 결행한 것이다. 1496년 12월 칙령에 의하면, 이듬해 10월까지 개종을 거부한 모든 유대인이 떠나야 했다. 그래도 스페인보다는 시간을 많이 준 편이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재산을 갑작스럽게 처분할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영세를 받아 개종을 택했다. 이처럼 이곳에서도 많은 유대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적은 수의 유대인만 추방되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모질게 굴지는 않았다. 스페인 왕국이 그랬듯 포르투갈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시기가 대항해와 경제적 번영기를 함께하는 전성기였다.
◇새로운 운송 수단의 발달이 권력 이동을 야기하다
경제사에서 새로운 운송 수단의 출현은 곧 권력의 이동을 의미했다. 말이 끄는 마차 덕분에 중앙아시아 부족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권력을 쥘 수 있었다. 기동성이 좋은 유목 민족이 농경 민족을 제압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그 뒤에도 계속된다. 마차가 내달릴 수 있는 도로를 잘 닦은 로마제국이 대규모 기동력을 바탕으로 유럽을 제패했다. 이후 치고 빠지는 기마술이 뛰어난 몽골군이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육지 운송 수단 다음으로 발달한 것이 해상 운송 수단이다.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이 월등히 앞섰던 중국이 정화 선단의 대항해에서 보여주듯이 당시 조공 무역을 통해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켰다. 그 뒤 중국이 외부 오랑캐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자국민의 출항을 금지시킨 ‘해금령’이 세계사의 흐름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선박은 모두 해체되거나 불살라졌다. 이러한 해금령 이후, 오히려 중국에서 발명되었던 나침반을 실제로 항해에 실용화시키고 선박에 키를 단 것이 서구였다. 이로써 중국이 물러난 자리에 서구가 바다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가운데에서도 중국의 나침반을 일찍 받아들여 사용한 이슬람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다. 이후 노잡이들을 이용한 대형 갤리선의 출현은 해적으로부터의 방어는 물론 획기적으로 유통 물량을 늘려, 베네치아가 지중해 상권을 쥐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 대형 함대들로 구성된 무적 함대의 출현은 스페인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같은 시기에 포르투갈이 만든 쾌속 범선은 콜럼버스의 대항해 시대를 열어 신대륙을 발견케 했다. 16세기에 지도 제작 기술이 발달하여 지도와 해도가 크게 개선되었다. 이후 보급 선박의 대량 제작 기술과 해상운임 경쟁력이 가장 앞섰던 네덜란드가 해상 교역을 주도하게 된다.
그 뒤 산업혁명의 원동력인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인한 증기선의 출현은 그간 바람에만 의지하던 해상 운송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또 육지에서 증기 기관차로 이어져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들어냈다. 이후 운송 수단의 화려한 꽃이 핀 것은 미국이었다. 대륙 횡단 철도의 완성과 자동차의 대량 생산 및 항공 산업의 발달은 미국을 세계 경제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운송 수단의 발달 경로와 함께하는 경제 권력의 이동은 공교롭게도 유대인의 이동 경로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