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6년 앤트워프에서 반란을 일으킨 용병들에 의해 시민 7000여 명이 살해당하자 유대인들은 앤트워프를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지역엔 유대인들과 종교개혁 여파로 박해를 피해 온 개신교도들이 한창 몰려들고 있었다. 또 1568년에 시작된 스페인 왕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그 무렵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스페인 왕국이 ‘네덜란드’를 지배하다

브루고뉴 공국. /위키피디아

당시 유럽 왕들은 나라를 마치 사유물처럼 취급했다. 15세기 초 프랑스 중동부와 네덜란드 영지를 보유한 부르고뉴 공국과 플랑드르 백국이 정략 결혼으로 합쳐졌다. 그 뒤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1477년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과 정략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와 플랑드르는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루이 11세가 영유권 분쟁을 시작하며 막시밀리안을 공격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1481년 프랑스군을 격퇴해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를 지켜냈다. 그러다 보니 신성로마제국이 지배하는 플랑드르를 포함한 저지대는 가톨릭이 극성을 부리는 스페인 왕국과는 달리,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곳이었다. 때문에 이베리아반도에서 박해가 있을 때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피신했다. 개종한 유대인을 일컫는 ‘마라노’들 역시 종교재판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렇게 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이 된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아들 필립 왕자와 딸 마르가레타 공주를 결혼 동맹의 수단으로 활용해 1496년 스페인 왕국과 겹사돈 관계를 맺는다. 그는 스페인 왕국의 후아나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그의 딸을 스페인 왕국의 후안 왕자에게 시집보냈다. 이 결혼으로 훗날 막시밀리안은 스페인뿐 아니라 나폴리와 시칠리, 사르디니아 그리고 신대륙의 식민지를 획득하게 된다. 이후 스페인 왕국의 후안 왕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막시밀리안의 아들 필립 왕자에게 시집온 며느리 후아나가 스페인 왕국의 상속녀가 되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왕국까지 지배하게 된다.

◇해가 지지 않는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위키피디아

그 뒤 필립은 스페인 왕국의 왕이 될 아들 ‘카를’이 1500년에 태어나자 그가 다스리던 플랑드르 지역을 포함한 저지대를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 저지대가 스페인 왕국의 땅이 된 것이다. 저지대를 선물로 받은 이 아들이 훗날 유럽의 패자가 된 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1세 왕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그는 1516년 스페인 왕국을 다스리시던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돌아가시자 16세의 어린 나이에 스페인 왕에 올라 신대륙 식민지까지 다스리게 된다. 플랑드르 헨트(켄트)에서 태어나 자란 카를로스는 스페인 왕국의 지배 아래 있는 저지대를 비교적 너그럽게 다스렸다. 카를로스는 1519년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돌아가시자 신성로마제국의 왕관과 전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를 상속받아 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로서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1547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위키피디아

이처럼 유럽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대영토를 확보한 이외에도 신대륙과 동남아의 필리핀 등 광대한 식민지까지 더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위세는 수 세기간 지속됐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유대인

1517년에 시작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유대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은 유대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종교개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박해는 끝났다. 유대인들이 증오했던 수도사와 수도원들도 신교에서는 없어졌다. 유대인들은 종교개혁을 환영했다. 초기에 신교도와 유대인들은 비교적 잘 지냈다.

마틴 루터. /위키피디아

마틴 루터도 처음에는 유대인을 옹호했다. 그가 가톨릭을 공격했던 내용 중의 하나가 가톨릭이 유대인들을 너무 무자비하게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사제와 수사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박해한 일을 루터는 강렬한 어조로 비난했다.

루터는 “유대인들은 지상에서 가장 좋은 혈통이다. 성령은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모든 책을 세상에 주시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녀요, 우리는 손님이요 나그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권했던 친절과 관심이 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루터의 말에 큰 기대를 걸고 그를 환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망했다. 그 뒤 루터는 교황의 박해를 피해 피신 중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 지역의 말들이 서로 달라 지난한 작업이었지만 그 통에 근대 독일어의 근간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쇄술 덕에 각지로 전파될 수 있었으며 루터의 의견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유대인에게 도움을 구했다. 1523년에 쓴 <예수 그리스도는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는 소책자에서, 루터는 도대체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자발적인 집단 개종을 바랬다. 그러나 루터가 번역한 성서보다는 탈무드 쪽이 훌륭한 성서 해석을 해놓았다면서 유대인들이 개종을 거부했다.

이때부터 루터는 돌변했다. 유대인들을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어 간행된 <유대인과 그 허위에 대해>라는 소책자는 홀로코스트를 향한 거대한 첫 발짝이라 할 만큼 유대인에 대해 과격한 독설을 퍼부었다.

먼저, ‘유대인의 시나고그에 불을 지르고, 타고 남은 것들은 몽땅 뻘 속에 파묻은 다음, 그 초석이나 불탄 재가 사람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루터는 부추긴다. ‘유대교의 기도서를 파기하고, 랍비가 설교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인의 집을 때려 부수고, 그곳에 사는 사람을 한 지붕 밑이나 마구간에 몰아넣은 다음, 그들에게 이 땅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유대인이 길거리나 저자 거리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 유해하고 독기 있는 구더기들을 강제 노동으로 내몰아서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자신들이 먹을 빵을 벌게 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말로 공격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반유대적인 소책자를 쓰기 이전부터, 그는 1537년 작센에서 유대인을 추방했고, 1540년에는 독일 거리 곳곳에서 내쫓았다.

◇장 칼뱅, 상인 곧 유대인을 지지하다

장 칼뱅. /위키피디아

이에 견주어 훗날 영국 청교도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된 프랑스인 장 칼뱅은 상인들을 지지했다. 당시 유럽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인들에게 칼뱅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이 신에게 봉사하는 길이라고 설교했다. 그 무렵 ‘상인(merchant)’은 유대인과 같은 뜻으로 쓰일 때가 많았다. 특히 해상무역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유대인을 ‘merchant’라 불렀다. 중세 말 유대인들은 대부분 모직물 분야의 머천트 어드벤처스(Merchant Adventurers) 회사의 일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칼뱅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그리하여 상업이 융성했던 네덜란드에 칼뱅파가 퍼지게 된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세속적인 직업 활동과 합리적이고 금욕적인 일상생활을 함께 영위해야 함을 강조했다. 칼뱅은 근대적 직업관과 생활윤리를 제시해 근대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칼뱅은 이렇게 유대인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칼뱅은 이자를 받고 대부하는 일에 대해 찬성했다. 칼뱅은 5% 이자율 한도 내에서는 빌려주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루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후 등장한 일부 신교도들도 고리대금업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폈다. 네덜란드 신교도와 영국 청교도들이 이자 상한선을 정해놓고 대부업을 허용한 것이다. 이것이 이 두 나라가 근대에 접어들어 금융 산업을 기반으로 상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칼뱅은 그의 저서를 통해 유대인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바람에, 루터파로부터 ‘유대화’ 되었다는 질책을 받을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둘로 갈라지다

그 무렵 저지대 사람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르고뉴 공국, 곧 지금의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혼인으로 스페인 왕가도 계승하자 1516년부터 스페인 왕 겸 독일 황제인 카를(카를로스) 5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 무렵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 왕, 독일 왕, 이탈리아 왕, 오스트리아 대공, 네덜란드 영주 등 20여 가지 직함을 가졌다. 그는 유럽에선 70군데 이상의 영지를 소유한 군주였고, 신대륙에선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전체, 그리고 동남아에선 실론(스리랑카)과 필리핀의 지배자였다. 필리핀은 당시 왕자였던 ‘필립의 땅’이란 뜻이다. 그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한곳에 머물지 않고 스페인에서 독일로, 이탈리아로 동분서주하며 전쟁을 벌였다. 카를은 이슬람의 종주국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고, 교황과 싸웠으며, 독일 내 신교도 제후들과 대치했다.

유럽 전역을 휘저으며 넓은 영토를 통치하다 지쳐버린 카를 5세는 이 큰 영토를 혼자 다스리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1555년 스스로 물러나면서 스페인 왕국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령 곧 네덜란드를 포함한 저지대와 해외 식민지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나머지 독일계 합스부르크령과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은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줌으로써 합스부르크가가 둘로 갈라서게 된다.

◇네덜란드, 1568년 독립전쟁을 시작하다

펠리페 2세. /위키피디아

이로써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가 1556년에 스페인 왕이 된다. 스페인의 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을 열게 되는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자신을 세계 가톨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플랑드르 지방 저지대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종교재판소를 세우고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신교도 가운데서도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행동적이고 저돌적이었다. 이들은 상공업에 열심히 종사하는 한편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저지대의 상인들은 펠리페 왕의 중과세 정책과 상업 규제에도 반발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교탄압과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과 과다한 세금 징수는 북부 네덜란드로 하여금 독립을 염원하게 만든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당시 북유럽을 휩쓸던 ‘성상 파괴 운동’이었다. 신교도들 특히 칼뱅주의자들은 가톨릭 성당에 설치되어 있는 마리아상 등 많은 조각들을 우상 숭배로 여겨 이를 공격해 파괴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이윽고 1566년 8월에 반란을 일으켜 저지대 전역의 400개 이상의 가톨릭 성당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당시 펠리페 2세가 급파한 스페인 총독 알바 공은 대량 학살로 불온사상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이듬해 그는 급속하게 확산되던 반란을 진압하고 신교도 1만 8천 명을 처형했다. 그리고 무역에 중과세를 부과했다. 이러한 중과세로 인해 네덜란드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자 1568년 반란의 불길이 더욱 거세져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펠리페 2세는 즉각 알바 공을 지휘관으로 삼아 1만 명의 진압군을 파견했다. 이에 네덜란드 17개 주 가운데 자유도시가 많았던 북부 저지대의 7개 주는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스페인 진압군은 전쟁에서 포로를 인정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것이 80년간 계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오다

1538년의 암스테르담.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원래 ‘암스텔강의 둑’이란 뜻이다. 13세기에 어민들이 암스텔강에 둑을 설치하고 정착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 뒤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함부르크의 맥주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16세기 중엽부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앤트워프나 브뤼헤보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용 정책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들하고 결혼하거나 국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원하는 바였다.

게다가 앤트워프가 1585년에 스페인에 다시 정복되자 절반 가까운 시민들은 북부 네덜란드로 탈주했다. 그나마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도 이때 대부분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앤트워프 시민 일부는 다른 나라로 떠나갔는데 그 가운데 만여 명이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당시 영국은 유대인의 공식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을 때였지만 해상무역의 진흥을 위해 유대인의 입국을 눈감아 주었다. 아니 영국이 불러들였다고 보는 게 옳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당시 영국이 무역에 있어서는 ‘양모’라는 단일 품목 수출과 ‘앤트워프’라는 단일 수출 시장에 목매고 있을 때였다. 또 영국 왕실의 긴급 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영국 내 유대 금융인이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자금 조달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앤트워프에 대리인을 파견하여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 쓰던 실정이었다. 당시 그 대리인이 무역상이자 외교관이었던 ‘토머스 그래셤’이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래셤의 법칙을 발표한 그 사람이다. 이때 앤트워프에서 건너간 유대인들이 그 뒤 영국의 해상무역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이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와 1605년 레반트회사를 설립하여 동방무역을 주도했다.

네덜란드. /위키피디아

이러한 유대인의 이주는 당시 플랑드르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반면 암스테르담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자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모여들었다. 더불어 암스테르담이 부흥하자 유럽 각국의 부유한 상인과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네덜란드, ‘종교의 자유’ 선언

1579년 네덜란드는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것이 강력한 흡입력을 발산하여 네덜란드는 유럽 전역에서 종교 난민들을 흡수했다. 유대인들이 각지에서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영국에서 국교인 성공회에 대항한 칼뱅주의자들도 심한 박해 때문에 네덜란드로 피신해 왔다. 이때부터 네덜란드에서 종교의 자유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존중되었다.

세상의 대부분 종교는 무소유와 청빈을 강조한다. 그런데 유독 부의 축적이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종교가 두 개 있다. 바로 유대교와 칼뱅주의에 뿌리를 둔 청교도이다. 당시 네덜란드 경제의 주축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과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건너온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곧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증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같이 이들 청교도로부터 자본주의가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베르너 좀바르트는 “자본주의는 유대인을 따라 들어왔다.”고 이를 반박했다.

여하튼 유대교와 칼뱅주의 정신과 자본이 네덜란드를 세계의 무역, 금융, 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스페인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마라노들도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종교 환경 덕분에 다시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이름을 다시 히브리어로 바꾸고 남자는 할례를 행하면서 유대교로 되돌아갔다.

◇암스테르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다

1576년 ‘앤트워프의 학살’ 사건으로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몰려온 지 15년 만인 1580년대 말에 이르러 암스테르담 규모는 이전보다 3배나 커졌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 항구가 가지고 있던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가면서 유럽 최대 항구로 급성장했다.

유대인들은 16세기 말에 이르러 암스테르담 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경제사에서 근대 들어 두 번의 ‘유대 대상인의 시기’가 있었다. 1590년부터 1609년 사이의 20년을 첫 번째 ‘유대 대상인의 시기’라 부른다. 그만큼 경제사에서 중요한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곧 ‘중상주의’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닻을 올린 것이다. 조나단 이스라엘 런던대 교수는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을 주도하면서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빠른 기간 내에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 상권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암스테르담을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다음 회에서 자세히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