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향신료 생산지 인도네시아로 직행하다

1588년 무적함대가 격파된 뒤에도 스페인은 신대륙 무역에서는 여전히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향신료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주도권을 쥐었다. 마르코 폴로에 의해 인도네시아 동부의 몰루카스(Moluccas) 섬들이 향신료의 섬들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서양인들에게 알려지자 네덜란드인들은 직접 그 원산지를 찾아 나섰다.

동부의 몰루카스(Moluccas) 섬들

네덜란드인들은 1591년 첫 동양 탐험에 이어 1595년 동양으로 함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바로 향신료 무역 중심지로 직행하여 지금의 자카르타에 근거지를 세우고 포르투갈 사람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가는 길목의 실론과 케이프타운에 중간 통상거점을 세우고 거대한 아시아 무역망을 발전시켰다.

◇육두구와 정향을 독점 거래하다

그 뒤 이들의 주요 거래 물품은 후추, 육두구, 정향, 계피 등 향신료였다. 당시 후추는 금값이었다. 이런 후추보다 더 비싼 게 육두구였다. 영어 이름인 ‘너트메그’(nutmeg)란 사향 향기가 나는 호두라는 뜻이다. 그 무렵 향신료는 부피가 적고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매우 수익성이 높은 상품이었다. 정향을 실은 네덜란드의 첫 상선은 무려 2500%의 순익을 남겼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경쟁이 심한 인도의 후추를 피해 인도네시아 향신료 섬들과 수마트라ㆍ자바를 비롯한 동남아 각지의 지배권 확립하고 육두구와 메시스 그리고 정향 등을 독점 거래했다.

육두구. /위키피디아

유대인들은 이렇게 향신료의 산출뿐만 아니라 판매까지 일괄하는 독점 체제를 완성하여 동인도에서의 구입 가격과 유럽에서의 판매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생산지 가격은 최저로 억제하고 유럽에서의 판매 가격은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며 독점이윤을 실현했다. 이 같은 방법으로 헐값에 산 향신료들을 가득 싣고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보통 100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남겼다. 선장과 선원들은 고향에서 영웅이 됐고, 항해에 자금을 댄 상인들은 떼돈을 벌었다.

이렇게 향신료 무역은 성공하면 대박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비용과 희생도 따랐다. 향신료 구입에 필요한 자금 외에도 대포가 장착된 배와 능력 있고 경험이 풍부한 선장과 선원들을 확보해야 했다. 게다가 위험도 많았다. 1600년을 전후해 세 번에 걸쳐 동인도로 파견된 약 1200명의 영국 선원들 가운데 무려 800명이 항해 도중 괴혈병과 장티푸스로 죽었다. 풍랑과 암초를 만나 배가 침몰하기도 했다. 또 현지에서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향신료를 싣고 오던 배가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의 무장 범선을 만나 약탈당하고 심지어 잔인한 학살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힘든 항해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오는 선원들과 상인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연유로 해상무역을 하는 회사는 무엇보다도 군사적으로 적들보다 강해야 했다. 그리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운용해야 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본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아예 ‘주식회사와 국가가 결합된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동인도회사에 주어진 권한은 정부 권한에 버금갔다.

◇유대인이 주도하는 동인도회사, 막강 권력을 갖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 네덜란드 국기를 차용했는데 가운데가 동인도회사 로고이고 바탕색 빨강은 용기, 하양은 신앙, 파랑은 충성심을 상징한다. /위키피디아

중상주의를 기치로 내건 네덜란드 정부는 1602년 유대인들이 대주주로 있는 동인도회사에 인도 항로를 포함한 아시아에 대한 독점무역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해상교역권 이외에도 식민지 개척 및 관리권도 주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협상의 권리와 교역 상대국 안에서 독립적인 주권도 보장해 주었다. 아울러 식민지 개척을 위해 회사가 군대를 가질 수 있게 했다. 이와 함께 동인도회사는 관리 임명권은 물론 식민지 개척과 운영에 필요한 치외법권과 전쟁선포권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조약체결권과 화폐발행권도 주어졌다. 그밖에 식민지 건설권, 요새 축조권, 자금 조달권 등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경쟁자와 싸울 때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동인도회사는 한 나라에 비견되는 막강한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동인도회사의 대주주들에게 자유 재량권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위임되었다. 한 마디로 유대인 대주주들이 동인도회사의 교역정책과 식민지 정책을 주도한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포르투갈의 기선을 제압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무역 독점권’을 얻는 것을 지상목표로 했기 때문에 무력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독립운동 차원에서 스페인과 한패인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를 공격해 약탈하거나 아예 근거지를 빼앗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인도네시아에서 수집한 향신료를 유럽에 수송하는 항로에 포르투갈의 식민지 말루카가 길목을 막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말라카에 대한 첫 공격은 1606년 8월에 전개되었다. 동인도회사 소속 함선 11척이 말라카의 포르투갈 요새를 포위하고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포르투갈군도 맞대응했지만 네덜란드군의 포화가 훨씬 우세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함대는 뭍에 상륙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 3일 만에 철수해 요새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포르투갈의 기를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근 수마트라와 자바섬의 술탄국들에게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이길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현지 부족 국가들의 지원을 얻는 계기를 마련했다.

◇육두구 산지 반다제도에서의 야만적 행위

당시는 교역과 약탈이 혼재된 야만적 침탈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일예로 당시 향신료 거래 중에서 가장 큰 이익을 내는 것이 육두구였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반다해의 반다제도에서만 자랐다. 원래 인도네시아라는 국명 자체가 그리스어로 인도라는 의미의 ‘인도스(Indos)’와 섬이라는 뜻의 ‘네오소스(Neosos)’가 합쳐진 말이다. 이처럼 유럽인들은 인도네시아를 당시 향신료 교역의 중심지인 인도의 연장선상에서 보았다.

육두구는 당시 흑사병의 치료제로 알려져 있었다. 영국의 한 외과 의사가 흑사병에 육두구만이 유일한 치료제라고 주장한 이후 사람들이 앞다투어 육두구를 찾았다. 때문에 육두구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한때 금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인들은 당시 포르투갈 군이 지배하던 반다제도의 토착민 족장으로부터 육두구 향료무역의 독점권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토착민들의 반포르투갈 정서가 큰 힘이 되었다. 당시 반다제도에는 수천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사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오기 90년 전인 1512년부터 이 섬에 나타나서 횡포를 부린 포르투갈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토착민 족장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양측은 다른 유럽인들을 섬 밖으로 몰아내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이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어 벌어진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예상외로 힘없이 물러갔다. 한 달 후 네덜란드인들은 반다 섬에 요새를 지었다.

그 뒤 이들은 야욕을 드러냈다. 무자비한 군사작전으로 토착민 족장과 원주민들을 살해하고 반다 섬을 무력으로 정복했다. 비신사적인 야만적 행위였다. 이것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최초의 식민지였다. 7년 후인 1609년 반전이 일어났다. 현지 원주민들은 복수전을 펼쳐 모든 네덜란드인들을 살육하고 섬을 탈환했다. 이후 1916년에는 영국군이 이 섬을 정복했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은 곳곳에서 부딪쳤다.

[향신료 전쟁① 후추·육두구·정향, 향신료가 바다의 주인을 바꿔버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09년 일본 히라토에 무역관을 세우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에까지 해상교역을 넓혀 나갔다. 1609년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히라토(平戶)에 최초의 네덜란드 무역관(상관)을 설치했는데 그 조건은 막부(幕府)의 엄격한 요구를 받아들이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포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일본에서는 도자기, 비단, 차와 더불어 은과 구리도 수입했다. 당시 일본에서 네덜란드와 경쟁 관계였던 포르투갈의 일본 무역선단 사령관 ‘로푸 드 카르발류’(Lopo Sarmento de Carvalho)도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끼리의 각축이었다. 이후 일본의 난학(네덜란드 학문) 도입과 조선의 기술에 힘입은 일본 도자기와 은의 대량 수출은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 초석이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11년 자바에 식민도시 바타비아를 건설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암스테르담 운하를 본떠 만든 바타비아 식민도시. /위키피디아

아시아 식민지 초대 총독이자 동인도회사 제4대 총독인 유대인 얀 피터스존 코엔(Jan Piterszoon Coen)은 1611년 자바에 식민지 기지 바타비아를 건설했다. 코헨이나 코엔은 전통적인 유대인 사제의 성이다. 그는 자바의 반탐과 마타람 두 왕국의 왕위 계승 분란을 미끼로 점차 침략의 마각을 드러냈다. 결국 네덜란드는 영국인과 반탐인을 자카르타에서 물리치고, 1616년에 지금의 자카르타를 네덜란드의 옛 이름인 ‘바타비아’로 명명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군의 잔인한 행동은 자바의 섬들을 공격할 때 드러났다. 2500명의 반탐인들이 굶어 죽거나 칼에 찔려 죽었고, 3000명은 섬에서 쫓겨났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19년에 인도네시아 전체를 점령했다. 같은 해 네덜란드와 영국은 아시아에서 향신료 전쟁을 중단하기로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인도에 집중하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