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선 교수는 2010년부터 줄기차게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 온 보건학자다. 그는 2000년 의약분업에 저항하는 의사들을 달래려 의대 정원을 10% 감축한 밀실 합의가 의료 대란의 ‘원죄’가 됐다고 했다. “의대 증원 없이 필수 의료, 지방 의료 살리기는 그림의 떡”이라고 주장하는 정 교수를 만났다. 보건복지부, OECD를 거쳐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로 있는 그는, 40년간 각국 의료 제도를 연구해 온 전문가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설계엔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증원 반대하는 ‘과학적 근거’ 있나?
-14년 전부터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까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5년 근무하면서 국가별 통계를 비교 분석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의 의사 수, 의대 정원 숫자는 그때 이미 꼴찌였다. 2010년에도 우리나라 의사는 1인당 연간 650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OECD 평균의 3배였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면서 OECD는 계속해서 한국의 의사 부족을 경고했지만 증원은 없었다. 나라도 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사들은 2000명 증원에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한다.
“서울대, KDI, 보건사회연구원이 현재 의료 수요에 비해 의사가 1만~1만5000명 부족하다는 결론을 냈다. 방법론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결론은 대동소이하다. 1년에 2000명씩 증원해도 이들이 의사로 활동하는 시기는 2031년부터다. 지금도 늦었다.”
-터무니없는 숫자는 아니란 건가?
“인구 10만명당 의대 정원이 OECD 평균 14명인데 우리는 6명이다. 이 또한 38개국에서 꼴찌다. OECD 평균값으로 하면 우리나라 의대 정원은 7000명이어야 하는데 현재 3058명이다. 그 중간인 5000명을 목표로 설정했을 때 현재 정원에서 2000명을 늘리는 건 합리적이라고 본다.”
-새로 선출된 의사협회장은 오히려 의대 정원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료 수요는 소득 증가와 고령화에 맞물려 늘어난다. 2035년까지 노인 인구가 70% 증가한다.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가 지난 20년간 최소 22%에서 최대 160%까지 정원을 늘린 반면, 우리는 감소·정체 상태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래도 한꺼번에 65%(2000명)를 늘리는 건 과격하지 않나.
“의약분업 타결 후 2006년까지 입학 정원을 350명 줄였다. 그때 감축하지 않고 그대로 왔으면 2025년에 6600명(350명씩 19년), 2035년엔 1만명(350명씩 29년)이 자연 보충돼 굳이 증원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첫해 2000명 증원이 많아 보이지만 의과대학 40개로 나누면 학교당 평균 50명이다. 또, 임상 기초 교육이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건 본과부터라 3년 후인 2027년까지 정부와 대학이 교육 여건을 마련하면 된다.”
-1000명씩 10년으로 완화하는 중재안도 나오더라.
“가능하다. 그런데 의협은 증원 자체를 반대한다. 의협도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에도 증원 시도가 있었다.
“정부의 증원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명박 정부때인 2012년엔 정부와 의료계 전문가들이 TF를 꾸려 증원을 논의했지만 의사들 반대로 무산됐다. 문재인 정부 때는 10년간 400명씩 4000명을 늘린다고 발표했는데, 그때도 전공의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더욱이 코로나가 발병한 시점이라 그렇잖아도 의료진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가 두 손을 든 것이다. 의료 파업이 일어나면 환자들이 불안해하고 정부는 비난 여론을 피하기 어려우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물러나는 일이 반복돼 왔다.”
◇총량이 많으면 배분도 수월하다
-한 소아과 교수는 2000명이 아니라 2만명을 늘려도 소아과로는 오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피부·성형 등 비급여로 돈 버는 의사들만큼 필수 의료 분야의 수가 전체를 200%, 300% 이상 보상해 주지 않는 한 어차피 안 간다는 것 아닌가. 물론 수가 보상은 중요하다. 그러나 증원과 구조 개혁 없이 의사들이 원하는 만큼 수가를 맞춰주려면 국민이 내는 보험료도 두세 배 올라야 한다. 현재 소득의 7%인 건강보험료를 20%까지 낼 수 있나. 정책은 국민 부담을 가장 덜 주는 방향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의협은 ‘총량이 문제가 아니고 배분이 문제’라고 맞선다.
“증원 시도 때마다 나오는 의협의 논리다. 그런데 나는 ‘총량이 문제고 배분은 더 문제’라고 답해왔다. 우리는 총량 자체가 부족한 데다 배분은 개인에게 맡겨놓으니 필수 의료 분야로 인력이 가지 않는다. 반면 총량이 많으면 배분도 수월해진다. 이를테면 피부·성형 분야라도 시장에 의사가 충분히 공급되면 가격도 내려간다. 따라서 공급도 줄고 피부·성형으로 가려던 의사들이 필수 분야에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 여기엔 ‘의사로서의 가치’도 작용하기 때문에 필수 의료에 소신을 갖고 일하려는 의사가 자동으로 늘어난다. 이건 인력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른바 ‘낙수 효과’를 통한 인력 공급인데, 의사들은 의술을 시장 논리로 접근했다고 비판한다.
“우리 의료 제도는 공급은 시장 원리에 맡겨 효율성을 높이고, 수요는 건강보험을 재원으로 해서 조절하는 체계다. 내가 필수 의료 분야 의사들을 ‘낙수 의사’로 모독했다고 하던데, 나는 시장의 낙수 효과를 말했지 ‘낙수 의사’란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의사가 많아지면 경쟁으로 인한 과다 진료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높아진다던데.
“의사가 부족한 한국에선 거꾸로다. 의사에 대한 초과 수요로 의사의 보수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이는 다시 의료 서비스 수가에 반영돼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높인 것이 지난 20년 환산 지수 계약 체제의 경험이다.”
◇전공의 없으면 흔들리는 韓 의료 민낯
-의사들이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건 소득 감소를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보나.
“IMF 외환 위기를 지나고 의대 정원까지 줄면서 의사라는 직역(職域)의 희소가치가 급상승했다. 실제로 2006년 감축된 의사들이 현장에 나오게 된 2015년부터 연봉이 급격히 올라간다. 평균 40~50% 올랐고 현재 의사의 평균 소득이 3억원 안팎이다. 지방 공공의료원은 연봉 4억, 5억원을 줘가며 의사를 모셔 가야 한다. 파업 명분으로 의사들은 필수 의료 붕괴 우려가 70%, 소득 감소 우려가 30%라고 하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본다. 의대 증원으로 의사의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것, 사회지정학적 위치가 낮아질 것을 염려한다고 생각한다.”
-의협은 정부가 제시한 ‘필수 의료 패키지’를 백지화하라고 주장한다.
“숙련도와 위험도가 높은 필수 의료의 수가 체계를 제대로 보상하고, 영상 촬영·검사 등 고평가된 분야의 수가는 줄이겠다는 게 이번 패키지의 핵심이다. 실제로 분만 수가가 80만원에서 256만원으로, 대동맥 박리 수술 수가가 670만원에서 933만원으로 올라간다. 형사처벌 특례도 만들어 필수 의료진이 수술에 최선을 다하고도 소송 당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다.”
-그런데 왜 반발하나?
“의사들이 문제 삼은 건 개원면허제와 피부·미용 분야를 다른 직역에도 개방한다는 대목, 그리고 혼합 진료 금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개원면허제는 의대만 졸업하고 수련의 과정없이 바로 개원할 경우 면허제를 시행하겠다는 것이지 전공의들이 맘대로 개원을 못 하게 한다는 게 아니다. 피부·미용 분야 개방은 못마땅할 수도 있다. 전공의 60%가 개원의로 나가는데 고수익을 기대했던 비급여 분야를 정부가 통제하려는 것처럼 보이니 백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확정된 사안이 아니고 의료개혁위원회에서 논의해 보자는 것이니 일단 협상 테이블로 나가야 한다.”
-전공의를 갈아 넣어 수익을 창출하는 대형 병원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미국 FDA에서 의약품 허가 임상 시험 절차가 정비된 건 약의 오남용으로 사지 소실된 아이가 태어난 ‘탈리도마이드 사건’에서 비롯됐다. 이번 전공의 파업 사건도 대형 병원의 30~40%를 차지하는 전공의가 없으면 의료 체계가 멈춰서는 민낯을 온 국민이 보게 했다. 동시에 의료 개혁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해줬다. 당연히 전공의 비율은 줄이고 전문의 비율을 늘려야 한다. 정부도 대형 병원의 전공의 비율을 10%대로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전공의의 36시간 연속 근무 중단, 100만원씩 수당 지급도 제안했더라. 진료보조간호사(PA)의 역할 조정도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걸 이행할 예산이 정부에 있을까?
“건강보험재정은 지난 20년 중 약간의 당기적자가 났던 3년 정도를 빼고는 모두 흑자였다. 현재 28조원이 쌓여 있는 것으로 안다. 소아과, 산부인과, 응급의료 등 수가 보상이 열악한 곳에 집중적인 지원이 이뤄졌으면 한다.”
◇욕먹으면서 증원 외치는 이유
-의사들은 정원을 늘리면 의사 수준이 떨어진다고 한다.
“수능 1등부터 3000등까지 의대부터 지망하는 현실이 비정상 아닌가? 대한민국 의료가 세계 최고라는데, 최근까지 우리 의료를 이끌어온 기성세대 의사들이 요즘 수능 기준으로 1·2등급 받던 학생들이 아니었다. 하이테크 분야면 몰라도 일반 의사직에 극도로 뛰어난 두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인재들은 이공계로 가야지. 의사의 자질은 입학 성적이 아니라 교육과정에 달려 있고, 환자에 대한 마음, 의술에 대한 철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증원도 의협의 거센 반발을 유도했다.
“그런 점이 없지 않지만, 나는 윤석열 정부가 역대 정부처럼 시늉에 그치지 않고 의대 증원의 물꼬를 튼 것을 높이 평가한다.”
-의사들의 ‘공공의 적’이겠다.
“면전에서 대놓고 욕하는 분도 있다(웃음).”
-서울대 의대 못 간 한풀이 하냐고 시비하는 사람은 없나?
“내가 78학번인데 당시 의대를 포함한 서울대 모든 단과대학 커트라인이 나의 입학 성적보다 한참 낮았다(웃음).”
-왜 욕을 먹으면서까지 의대 증원을 주장하나?
“우리 의료 제공 체계는 의사의 판단과 처방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렇게 중요한 의사의 수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으면 의료는 멈춰 선다. 그런데 우리나라 의사의 유일한 공급 루트인 의대 정원이 20년 전부터 반대 방향으로 달려왔다. 전문가로서 어찌 보고만 있나. 자기들 ‘허락’ 없이 의대 증원은 무조건 안 된다는 건 어느 직역(職域)도 상상할 수 없는 오만이다.”
☞정형선
196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를,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행정고시에 합격, 보건복지부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일하다 2002년부터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연구소장, 한국보건행정학회장, 보건복지통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