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민주주의 위기에 ‘3김(金)’을 언급하는 이가 많아졌다. 87년 6월 항쟁으로 태어난 신생 민주국가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끌며 민주주의 기반을 다진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마침 하나회 청산으로 군부를 탈(脫)정치화하고, 금융실명제를 통한 경제 민주화, 지방자치제로 권력 분산을 시도했던 김영삼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본격화한다. 광복 80년, 김영삼 서거 10주기를 맞아 ‘건국 대통령 이승만, 산업화 대통령 박정희, 민주화 대통령 김영삼’을 주제로 본지와 연속 세미나를 개최하는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YS는 갈라치기보다 화합을 택하고, 억울해도 승복했으며, 국민이 용서할 때까지 사죄한 지도자였다”고 했다.
대통령 탄핵 선고 후 우리는 승복과 용서, 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군부·민주 세력의 역사적 대타협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이 ‘3김 시대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라고 했더라.
“군부독재와 싸워 일군 민주주의가 민주화 이후 오히려 퇴행을 거듭해 왔다는 안타까움 아닐까. 3김 시대에는 의회 정치가 살아 있었다. 지금은 극단으로 쪼개진 광장의 분열만 남았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력 부재가 오늘의 상황을 초래했다고 한다.
“엄혹한 유신 시대에도 박정희와 김영삼은 영수회담을 했다. 요즘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원수고, 때려눕혀야 할 적으로 공격한다.”
-김영삼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헌법재판소 결정에 무조건 승복하겠다고 선언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는 어떤 판결에도 승복하겠다는 대국민 메시지를 내야 한다. 그래야만 탄핵 선고 후 소요와 파국을 막을 수 있다.”
-YS 10주기가 남다르게 다가오겠다.
“어느 때보다 YS의 통합 정신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3당 합당으로 군부와 민주화 세력의 역사적 대타협을 이뤄냈다.”
-3당 합당은 정치적 야합으로도 비판받는데.
“아버지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군 중심의 보수 말고 새로운 보수를 만들어야 한다며 다수파인 민정계를 설득해 나갔다. 허주 김윤환계부터 노태우 대통령 측근들까지 ‘신YS계’로 끌어들였고, 결국 헌정사 최초의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사과 잘한 대통령’이라고도 한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등 개발독재 시대 급속한 산업화의 폐해에서 비롯된 사고들이었지만, 아버지는 전 정권 탓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불찰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탄핵도, 거부권 행사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 시대엔 정치권의 물밑 대화와 협상이 활발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도 ‘합의제 방식’의 정치 관행이 있어 극단적 대립으로 가지 않았다.”
-YS 10주기에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평가도 함께 하더라.
“세 분 다 보수의 대통령이면서 건국·산업화·민주화로 나라의 기틀을 만드셨다. 그런데 보수당에서 한 번도 세 분을 연결해서 평가하는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부정했고, 김영삼은 박정희를 비판했지만 그런 정반합 과정을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이 완성됐다고 본다.”
-올 하반기 부산에 ‘김영삼대통령기념관’이 착공된다던데.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문민정부를 재평가할 수 있게 돼 기쁘다.”
◇IMF 외환 위기 재평가할 것
-김영삼과 문민정부가 저평가됐다고 생각하나?
“김대중 정권은 IMF 외환 위기만으로 문민정부의 성취를 흑역사로 덮어버렸다. ‘깡통공화국’이라 폄하하고 희화화했다.”
-하나회 청산과 금융실명제가 대표 업적일까?
“YS가 당선됐을 때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유수 언론은 김영삼이 군부와 타협하지 않으면 통치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YS는 취임 직후 전광석화처럼 하나회를 청산했다. 국내 주요 언론은 금융실명제 단행만으로도 문민정부의 개혁은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방자치제, 공직자 재산공개, 쓰레기 종량제도 문민정부에서 시작됐더라.
“정부 수립 46년 만에 평시작전통제권을 가져온 것이 문민정부다.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을 철거하고, 상해 임시정부청사를 복원했으며,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꿨다. 김대중 정부는 정보화를 자신들 업적으로 치부하지만, 전국 가정에 광케이블을 깔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접속하게 한 건 문민정부였다.”
-문제는 모든 공을 엎고도 남을 만큼 IMF 외환 위기의 고통이 컸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하겠다는 것이 10주기 세미나의 목적이다. 일차적 책임은 문민정부에 있지만, 개혁의 발목을 잡은 야당의 책임이 결코 적지 않다.”
-야당의 책임?
“외환 위기는 한보철강의 부도로 시작됐지만 치명적 독(毒)은 기아그룹이었다. 기아차를 부도 처리해야 하는데 대선을 목전에 둔 DJ와 야당이 호남 기업이라며 결사 반대했다. 노조와 합세해 ‘국민기업을 죽인다’며 정치 공세를 펴니 대외 신인도가 급락했고, 결국 구제금융으로 이어졌다.”
-재벌 개혁, 노동 개혁을 하지 않은 탓 아닌가?
“당시는 WTO 체제의 다자간 무역을 중심으로 세계화가 가속화할 때였다. 대기업의 수출 산업 위주로 성장해온 한국에서 재벌을 해체하고 경제 구조를 개혁한다는 것은 5년제 단임 대통령이 하루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동 개혁은 왜 못 했나?
“노동과 고용의 유연화를 골자로 한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야당과 양대 노총이 날치기라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정부가 그냥 강행했어도 되는데 여야 관계가 파행으로 치닫는 걸 원치 않은 YS는 재협상을 위해 본안을 폐기시켰다. 그때 뼈를 깎는 개혁을 했다면 IMF 파고는 막을 수 있었다. 후회 막심한 대목이다.”
◇내겐 비정한 아버지였다
-문민정부 폄훼에는 ‘차남 김현철’ 몫도 적지 않은데.
“주홍글씨로 한번 찍히니 돌이킬 수 없더라. 야당이 나를 ‘한보의 몸통’이라고 선동했지만, 기소조차 되지 못했다. 내가 구속된 건 ‘조세포탈죄’라는 죄목인데, 남은 대선 자금의 이자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 첫 케이스였다.”
-국정에 개입한 건 사실 아닌가.
“아버지는 나를 포함해 여러 참모의 의견을 들었다. 레이건이 경청의 왕이라면 YS야말로 한국판 경청의 왕일 것이다. 당신은 질문만 던지고 묵묵히 다양한 의견을 들은 뒤 최선의 결론을 내렸던 분이다.”
-공적 직함 없이 대통령 참모 노릇을 해서 지탄받은 게 아닐까?
“아버지에게 제일 화가 나는 게 바로 그 대목이다(웃음). 나를 부려 먹기만 하셨지, 어떤 직책을 맡긴 적이 없다. 87년 대선을 도운 뒤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울면서 주저앉힌 분이 아버지인데, 직책은커녕 아들이 억울하게 감옥 가는 걸 그냥 보고만 계셨다.”
-그래서 국민은 YS를 자식도 구속시킨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않나.
“국민은 칭송할지 몰라도 내겐 최악의 아버지였다. 아들한테 일종의 사기를 치신 거다, 하하!”
◇뼛속까지 의회민주주의자
-YS와 DJ의 오랜 애증 관계도 지켜봤을 텐데.
“DJ에게 많이 속으셨다(웃음). 1971년 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가 DJ에게 뒤통수를 맞고 경선에서 떨어졌을 때도 ‘잘못된 룰도 룰’이라며 승복하셨다.”
-후보 단일화도 번번이 실패했다.
“나는 87년 대선 때 단일화에 실패한 아버지에게 쓴소리를 한 아들이지만, DJ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사실이다. 88년 총선 때만 해도 DJ는 (평민당에 유리한) 소선거구제를 받아주면 통일민주당과 평민당이 합당하고 92년 대선 전까지 경선을 통해 후보를 정하자고 제안해왔다. 그러나 DJ는 소선거구제만 관철시킨 뒤 약속을 어겼다. 나는 소선거구제가 오늘의 부정선거 논란과 거야의 입법 폭주를 야기하며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고 생각한다.”
-97년 검찰의 ‘DJ 비자금’ 수사를 막은 것도 YS였다던데.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야당 후보의 비자금 수사는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셨다. 당신이 공작 정치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김대중 정권 창출을 도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검찰 수사가 시작될 경우 호남의 극심한 저항으로 선거가 자칫 파탄 날 것을 염려하셨다. 아버지는 뼛속까지 의회민주주의자였다.”
-아버지와 화해는 하셨나?
“출소 후 상도동엔 한동안 발걸음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아들 면회도 허락하지 않은 비정한 분이었다. 그런데 병석에 누우신 걸 보니 눈물이 쏟아지더라.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치던 그 투사가 아니었다.”
-논객 조갑제가 이준석을 ‘젊은 시절 YS 같다’고 해서 논란이 됐었다.
“이준석은 언변과 정치력이 뛰어나지만 재승박덕이 아쉽다. 아버지는 해공 신익희선생부터 조병옥, 윤보선 대통령까지 당내 구파·신파 어르신들을 극진히 모셨다.”
-김홍업, 박지만, 노재헌 등 대통령 아들들의 모임은 지속되고 있나.
“물론이다. 홍업 형님이 편찮아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우리의 만남 자체가 통합과 덧셈의 정치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김영삼 회고록에 ‘박정희의 눈물’ 대목이 있다.
“1975년 영수회담이었을 것이다. 육영수 여사를 총탄에 잃은 박 대통령이 창 밖을 가리키며 ‘저 나무에 홀로 앉은 새가 꼭 내 신세 같다’고 하더란다. 유신과의 투쟁을 선언한 아버지를 누그러뜨리려는 전략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눈물을 믿었다(웃음).”
-YS가 외로워 보일 때도 있었나?
“청와대 계실 때 감옥이 따로 없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매주 들어가 말벗이 돼드렸는데, 어쩌다 한 주 거르면 ‘넌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냐’며 호통을 치셨다(웃음).”
-지난 7일은 손명순 여사 1주기였다.
“아버지 부족한 면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채우던 분이다. 최형우 장관은 대놓고 ‘난 YS계가 아니라 손명순계’라고 했을 정도다. 어머니가 너무 그립다.”
☞김현철
1959년 서울 출생. 경복고,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USC에서 경영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쌍용증권에 취직했으나 1987년 아버지 김영삼의 대선 운동을 도우며 정계에 입문, 중앙여론조사연구소를 세워 1992년 대선까지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거쳐, 동국대 석좌교수,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인생은 정비공’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