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 찬반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3월 7일 정오, 덕수궁 근처 서울도시건축전시관 노천 옥상에서 79세 남성이 분신을 했다. 기사에는 그 남성이 “윤석열 대통령 만세”라고 적힌 유인물을 뿌렸다고 쓰여 있었고, 악플이 어마어마했다. 그는 12일 후 사망했다.

지하철에서 정치 유튜브를 크게 틀어놓는 그런 어르신이었을까. 대체 왜. 수소문 끝에 그의 동창 세 분을 만났다. 우리 사회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이 서로 ‘팩트체크’ 해가며 이야기를 들려줬다.

1946년생 K씨는 함흥에서 월남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경복고에는 남들보다 한 해 늦게 입학, 말썽쟁이들에게 밥 사주고 타이르던 형 같은 동급생이었다. 연세대 졸업 후 교사를 하다 제조업체를 차려 성공했다. 경기도 부천의 작은 교회 시무 장로로 은퇴할 때까지 목사와 함께 교회를 일으켰고, 서초동 자택 근처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비슷했다. 기부와 봉사, 배려의 일화가 계속 나왔다. 지난 3일 K는 무신론자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내 소망은 네가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며 책을 보냈다. 제목이 ‘예수’였다.

지난 3월 6일 밤, 그는 자기 마음을 적었다. “저는 젊어서 진보였습니다. 김대중씨를 좋아했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 표 찍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미선이, 효순이 미군 탱크에 의한 교통사고와 광우병 사건,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숨은 종북 세력들의 음모가 엄청났습니다. 이제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고 옳고 그름의 문제인 것입니다….” 글은 종북 세력 확산과 자유민주주의·신앙의 자유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선관위에 대한 불만을 적었지만, 부정선거론을 맹신하지도 않았다.

7일 아침, K는 영정으로 쓸 사진을 액자에 넣어 책상에 올려두고 집을 나섰다. 배낭에는 문서 서른 장과 시너가 담긴 페트병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오전 11시 59분, 그는 라이터를 켰다.

말수가 적고, 주장이 많지 않던 그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는 꼬박꼬박 나갔다. 한 동창이 이유를 물었다.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저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래.”

정치적 주장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다. 70, 80년대 대학생들이 그랬다. 그들에게는 민주 투사, 열사 호칭이 붙었다. 70여 년 모범 시민으로 산 남성은 기사 속 익명으로 남을 뿐이다. 그의 주장이 기득권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우파적이고, 그가 청년이 아니고 노인이기 때문이다.

헌재는 그의 바람과는 다른 결론을 내놨다. 정치 공학을 아는 이들은 “보수가 깔끔하게 윤석열을 버렸으면 대선이 조금 더 유리해졌을 것”이라고, 시간을 끈 것은 ‘낭비’라고 지적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거리의 주장 때문에 탄핵으로 가는 길에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영장 청구권, 수사권, 헌재 심판의 절차적 정당성을 두고 갑론을박했다. 민주주의는 ‘절차의 전쟁’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한덕수, 이상민, 박성재가 돌아오고, 이재명 2심은 무죄가 나고, 윤석열은 돌아오지 못하는 결과를 그 많은 대중이 수용할 수 있었다.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던 K가 왜 꼭 그랬어야 하는지 아직도 친구들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며칠 전 새벽 기도를 갔다가 부름을 받은 것 같다” “괴물 같은 한국 정치에 휩쓸리고 말았다” “윤석열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종교를 지키려는 자발적 순교였다.”

분신 직전, K는 단톡방 몇 군데에 메시지를 보냈다.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79세 K에게는 미래를, 공동체를 생각하는 청년의 마음, 그게 있었다. 그의 영혼이 안식처에 이르렀길 빈다.

정치적인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K씨가 떠올린 건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K씨 지인 제공
정치적인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K씨가 떠올린 건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K씨 지인 제공